보은집회 ()

근대사
사건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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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보은집회는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이다.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한 광화문 복합상소가 실패한 후에 척왜양의 기치를 내걸고 개최한 집회이다. 전국에서 1만 내지 2만 명 정도의 교도가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에서 동학을 위협세력으로 간주하여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반면에 관군과 무력 충돌을 우려한 동학지도부는 평화적인 노선을 선택하여 해산을 결정하였다. 동학의 현실대항적 능력을 한 단계 높여서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정의
1893년 3월과 4월 동학교도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척왜양(斥倭洋)’을 내걸고 충청북도 보은에서 개최한 집회.
역사적 배경

동학지도부는 최제우(崔濟愚)신원만을 요구했던 복합상소(伏閤上疏)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하고 끝나자, 다시 도소(都所)를 교통이 편리하며 근거지의 하나인 보은 장내(帳內)로 옮겼다.

그리고 복합상소 이후 신원운동 주동자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고, 관리들의 탐학이 심해지자 동학교도들은 새로운 길을 강구하게 되었다.

더욱이 동학 내부에서도 금구집회처럼 대정부 호소에만 매달리는 지도부의 노선에 회의적으로 반응하는 세력들이 불거져 나오면서 분열의 위험조차 존재하였다.

그리하여 지도부는 신원운동에 부정적 입장을 취해 오던 최시형(崔時亨)을 설득, 보은 장내에서 다시 집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동시에 오랫동안 집단적으로 세력을 과시할 계획을 세웠다.

경과와 결과

현실적 외부 상황과 동학 자체의 사정을 고려, 정부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최제우의 신원은 일단 유보하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기존 체제와도 공존할 수 있는 척왜양의 기치와 그 전제 조건격인 교도를 탐학하는 관리를 처벌해 줄 것을 전면에 내걸었다.

강력한 척왜양의 의지는 지도부의 전술적 계산이거나 종교집단의 존립에 관계된 것뿐만이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저항이라는 성격도 가진다. 따라서, 보은집회는 동학교도의 정치사회적 운동이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선구적 민족민중운동의 성격도 내포하고 있다.

보은집회는 최제우의 수형일자인 3월 10일, 수만의 동학교도들과 충의지사(忠義之士)는 힘을 합쳐 왜양을 깨뜨려 보국하자는 내용의 「보은관아통고(報恩官衙通告)」를 만들어 보은관아 문에 붙임으로써 시작되었다.

13일부터 충청도 · 전라도 · 경상도를 비롯해 강원도와 경기도 등 각지에서 장내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 교도의 수는 1만 내지 2만 정도로 추산된다.

정부는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던 이전의 집회보다 훨씬 큰 규모의 집회에 놀랐다. 뿐만 아니라 복합상소나 척왜양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을 체제의 직접적 위협세력으로 간주, 즉각 선무사 어윤중(魚允中)과 청주진영의 부대를 보은으로 파견하였고, 청국군대의 동원까지 논의하였다.

정부가 강경하게 대응하자, 한 달 이상을 버티던 지도부는 척왜양의 요구에서 갑자기 후퇴, 어윤중이 가지고 온 고종의 해산명령을 수용하였다. 이와 같은 지도부의 해산 결정은 무력적인 방법은 배제한다는 당초의 계획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참가자들이 포접(包接)별로 엄정하고 일사분란하게 통제되고 돌담을 쌓기도 하여 마치 군진처럼 보이기도 하였으나, 지도부와 참가자들은 무력항쟁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

만약, 관군과 무력 충돌하게 되면 교도들이 다치거나 죽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동학 자체의 존립이 중대한 위기에 빠짐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평화적 노선을 택한 종교집단이 가지는 한계를 현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도부의 해산 결정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순응한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참가자들이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어윤중의 분석처럼, 참가자들은 관리와 토호의 탐학에 항거하거나 가난한 농상인 등 현실불평세력들이며,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예언하는 비결(秘訣)을 믿고 참가한 자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은집회의 실패를 동학 지도부의 계급성에서 찾기에는 그 근거가 불충분하다. 아직 참가자들의 계급적 위치가 실증되지 않았고, 종교집단의 의사결정에서는 계급적 이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동학지도부는 이 집회를 마지막으로, 신원운동이나 다른 청원운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동학을 사교로 낙인찍은 정부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무력을 동원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은집회 등 일련의 평화적인 시위성 신원운동은 동학과 현실 체제 사이의 갈등을 크게 증폭시켰다. 동시에 동학 자체의 현실대항적 능력을 한 단계 높임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의 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천도교회사(天道敎會史) 초고(草稿)』(동학사상자료집일, 아세아문화사, 1979)
『동학란기록(東學亂記錄)』 상(국사편찬위원회, 1959)
「동학(東學)의 대선생신원운동(大先生伸寃運動)에 관한 일고찰(一考察)」(장영민,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의 인식(認識)』, 1991)
「고부민란(古阜民亂)의 연구(硏究)」(정창렬,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48·49, 1985)
「1892·3년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과 그 성격(性格)」(김의환,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5,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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