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택 ()

근대사
인물
대한제국기 군부대신, 궁내부특진관, 중추원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65년(고종 2) 8월 11일
사망 연도
1919년 12월 17일
본관
전주(全州)
출생지
충청북도 충주
관련 사건
을사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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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군부대신, 궁내부특진관, 중추원고문 등을 역임한 관료.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65년 8월 11일 충청도 충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일제강점기에 남작 작위를 받은 이근호(李根澔)의 동생이자 이근상(李根湘)의 형이다. 조선 말기에 병조참판, 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제국기에 한성판윤, 육군부장, 군부대신 등을 지내며 ‘을사오적’으로 지탄으로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중추원 고문, 조선상업합자회사 총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7일 사망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72년부터 가정에서 수학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충주에 간 명성황후의 눈에 들어 1883년 12월 남행선전관(南行宣傳官)이 되었다. 1884년 5월 무과에 합격해서 1885년 3월 참상선전관(參上宣傳官)으로 승진했다. 1886년 8월 단천부사, 1887년 5월 희천군수로 전임되었으며, 9월 당상선전관(堂上宣傳官), 12월 길주목사에 임명되었다. 1888년 8월 당상선전관으로 이임했다가 9월 행수선전관(行首宣傳官)으로 승진하면서 별군직에 임명되었으며, 10월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충청수사(忠淸水使)로 전임되었다.

1889년 6월 전라병사(全羅兵使), 9월 총어병방(摠御兵房), 11월 한성우윤(漢城右尹)이 되었으며, 1890년 3월 병조참판, 7월 금군별장(禁軍別將), 1894년 2월 부평부사, 7월 좌부승지를 역임했다. 아관파천 직후인 1896년 3월 친위 제3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환어(還御) 계획을 세웠던 것이 밝혀져 같은 해 11월 면직되고, 1897년 1월 제주도로 유배를 갔다가 10월에 풀려났다.

1898년 10월 독립협회를 해산시키는데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11월 한성판윤, 12월 경무사(警務使)에 임명되었다. 1899년 6월 함경북도관찰사, 11월 중추원 의관에 제수되었다. 1901년 6월 경부협판(警部協辦)에 임명되면서 경부대신 서리로 활동했으며, 10월 육군참장(陸軍參將) 겸 헌병사령관을 겸했다. 1902년 3월 평리원재판장 서리를 겸하였고, 7월 의정부 찬정, 8월 경위원 총관(警衛院摠管), 9월 원수부 검사국 총장을 역임했다. 1903년 5월 육군부장(陸軍副將), 군부대신, 원수부 회계국 총장을 거쳤다.

원수부 회계국 총장으로서 1903년 10월부터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가 추진하는 한일밀약에 동조했으며, 11월 특명전권대사를 겸직하면서 일본과 밀약을 맺는데 앞장섰다. 1904년 2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11월 호위대총관을 겸했다. 1905년 3월 주전원경(主殿院卿), 4월 시종무관장, 6월 농상공부대신, 7월 법부대신으로 임명되었다. 8월에는 일본정부가 주는 욱일대수장(旭日大綬章)을 받았으며, 9월에는 군부대신으로 전임하면서 을사조약체결을 주도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1906년 2월 기산도(奇山度), 이근철(李根哲)의 공격을 받았고, 11월 중추원 의장, 12월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7년 3월 배종 무관장을 겸하였고, 5월 중추원 고문을 지냈으며, 9월 군대해산으로 육군부장에서 예편했다. 1908년 5월 대한흥학회 고문, 8월 기호흥학회 주무원 및 12월 특별찬성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적십자사에서 주는 유공장을 받았으며, 11월 기호흥학회에 매달 20환씩 기부하면서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을 맡았다.

1910년 10월 한일병합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가 자작 작위를 주었다. 같은 달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어 1919년 사망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고, 1912년 2월 조선상업합자회사 총재로 선출되었으며,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식민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개최한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7년 10월 친일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18년 9월 경성구제회에 기부했고, 1919년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사후 일본천황이 생전의 공로를 인정해 2,500원을 주었다.

이근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6·7·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04∼114)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음청사(陰晴史)』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주한일본공사관기록수록 한말 관인의 경력일반」(최영희, 『사학연구』21, 1969)
『朝鮮貴族列傳』(大村友之丞, 朝鮮問題硏究會, 19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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