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제주(濟州). 호는 바롬이다. 할아버지 고학윤은 미국인 선교사 통역이었고, 아버지 고명우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병원 의사로 활동하였고, 미국유학을 다녀와서 영어에 능숙하였다. 외가는 황해도 송천에서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였고 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가문으로 어머니 김세라는 정신여학교 1회 입학생으로 신교육을 받았다. 당고모가 김마리아, 언니가 고봉경(高鳳京)이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1909년 3월 6일 서울에서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황해도 은진의숙을 졸업한 후 1920년 관립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同志社]여자전문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여 4년간 영어공부에 매진하여 1928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유학 중이던 1928년 2월 근우회 교토[京都]지회 재정부 총무로 선출되었다. 다시 도시샤대학 법학부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해서 1931년 법학사가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건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여 1933년 경제학석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박사과정에 들어가 사회학을 전공하였다. 유학시절 미시건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들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학원을 수료한 1935년 귀국해서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해 법학, 경제학, 사회학, 영어 등을 가르치며 1944년까지 재임하였다.
1937년 1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 주도로 결성된 경성방송국 라디오방송 부인강좌 담당강사로 위촉되었고, 같은 달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도로 조직된 조선부인문제연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4월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있던 언니 고봉경과 사회복지사업기관인 경성자매원을 경성부 동교정에 설립하고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해 5월 미시간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 전공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해서 한국 여성으로 세번째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1937년 8월 전쟁비용에 보태라고 금비녀 등을 헌납하자는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사를 맡았다. 1938년 6월 무렵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가 세계YWCA협의회에서 탈퇴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일본여자기독교청년회동맹 가입을 결의할 때 김활란·유각경·박마리아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9월 조선부인문제연구회가 주최한 순회강연에 전라남북도 지역에서 강연하였다. 1941년 8월 임전대책협의회 설립에 참석하였고, 9월 임전대책협력회 회원으로 채권가두유격대 서대문대(西大門隊) 대원이 되어 1원짜리 ‘꼬마채권’을 팔았으며, 10월 최대 민간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2월에 부인대 지도위원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조선교화단체연합회가 주최한 시국대책순회강연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1942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부인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회의에 참석하였고, 5월 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에 참석하였으며, 6월 무렵 국민총력조선연맹 참사(參事)에 임명되었고, 12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이 주최한 ‘징병제취지부인강연회’ 강사로 활동하였다. 사회복지사업을 더 확장하여 1942년 무렵 출옥해서 갈 데가 없는 여성을 정서적으로 교화시키고 한글을 가르치고 경제적 자립교육을 실시하는 여자감화원 가정료와 생후 1개월 미만의 기아를 수용하는 영아원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무의탁 소녀들을 데리고 철원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짓다가 해방을 맞았다.
신문 · 잡지에 일제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여성을 대상으로 징병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였다. 주요 글을 보면 「명일의 가정: 자랑과 수치」(『半島の光』, 1941.5), 「전시의 가정: 가정은 국가의 뿌리」(『半島の光』, 1942.8), 「대전 일년간에 배운 것」(『半島の光』, 1943.1), 「징병감사와 우리의 각오, 건군정신에 투철」(『매일신보』, 1943.8.5), 「적전에 새해를 맞이하여」(『半島の光』, 1944.1), 「어려움을 기쁨으로 아는 생활」(『半島の光』 1944.9) 등이다.
해방 후 1945년 8월 조선재외전재동포구제회(朝鮮在外戰災同胞救濟會)가 조직될 때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10월 모교인 경기공립고등여학교 교장, 11월 조선교육심사위원회 제5분과위원회(중등교육 담당) 위원이 되었다. 미 군정청에 부녀국 설치를 건의해 초대 부녀국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8월 미국의 교육실태를 참고하기 위해 파견된 조선교육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1947년 3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범아세아회의’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대학교와 콜롬비아대학교에서 약 1년간 머물면서 ‘인구문제’를 연구하였다. 그뒤 영국 UN협회 초청으로 1950년 여름부터 1956년 초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그후 다시 미국으로 가서 사회학을 연구하였다.
1957년 귀국한 후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창설을 주도하여 1958년 4월 사회학과장을 맡았고 1960년 3월까지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임하면서 여성사회학자를 양성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8년 3월 대한어머니회를 창립하고 수석최고위원(지금의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이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조직한 재단법인 정의학원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61년 4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설립한 서울여자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1961년 11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63년 대한소녀단연합회(걸스카우트) 회장, 국제연합 한국협회 이사 겸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 제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 11월 국어순화운동전국연합회 회장, 1981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상임위원, 1983년 순국열사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84년 4월 서울여자대학교 명예학장을 거쳐 1989년 3월 명예총장이 되었다. 명예학장으로 재임하던 2000년 11월 2일 사망하였다. 1963년 광복 18주년 문화포장(학술 부문),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의 훈포상, 1985년 5·16민족상(교육 부문)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