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장은 대한제국기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참여자에게 나누어 준 배지이다. 기념장은 1900년 제정한 훈장 제도의 일환으로 발행했는데, 중요한 행사나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제작해 행사 참가자들에게 수여하였다. 현존하는 기념장은 1901년에 고종의 오십 세를 기념해 발행한 성수 50주년 기념장, 1902년에 발행한 고종 망육순 및 등극 40주년 기념장, 1906년에 황태자의 혼례를 기념한 가례 기념장, 1907년 순종의 즉위를 기념한 즉위 기념장, 1909년 순종의 남서 순행을 기념한 남서 순행 기념장이 있다.
기념장(記念章)은 민영환(閔泳煥)이 1896년(고종 33)에 특명 전권 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했을 때 가장 먼저 파악하였다. 그는 서구에서 축하 행사 참여자에게 기념장을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현지에서 스스로 기념장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기에 훈장 제도의 도입과 더불어 기념장이 도입되었으며 당시 발행한 기념장은 현재 성수(聖壽) 50주년 기념장, 망육순(望六旬) 및 등극 40주년 기념장, 가례(嘉禮) 기념장, 즉위 기념장, 남서 순행(南西巡幸) 기념장의 5종이 알려져 있다. 기념장은 대례복을 착용할 때 훈장과 더불어 왼쪽 가슴에 부착하도록 되어 있다.
1901년(광무 5) 9월 7일(음력) 고종(1852~1919)의 탄신 50주년을 맞아 발행한 기념장이다. 재질은 순은이고, 정원형 형태로 표면에는 정중앙에 황제가 제례를 드릴 때 착용하는 원유관(遠遊冠)을 새기고, 외변에는 띠를 둘렀다. 뒷면에는 “대한뎨국 대황뎨폐하 성슈 오십년 칭경 긔념 광무 오년 구월 칠일”이라는 글자를 양각 횡서로 표기하였다.
1902년(광무 6) 3월 18일(음력) 고종의 망육순과 등극(1863~1907 재위) 4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것이다. 재질은 적동(赤銅)이고 표면에는 전각을 새겼으며 이면에는 “대한뎨국 황졔폐하 성슈 망육순 어극ᄉᆞ십년 급 임깃합ᄉᆞᆸ경 긔염동쟝 광무륙년삼월십팔일”이라고 새기고 위의 중앙에는 원유관을 돋을새김하였다.
1907년(광무 11) 1월 24일 황태자(18841926)와, 계비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순정효황후, 18941966)의 가례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였다. 당일 참가자 전원에게 반사(頒賜)하였다. 이 기념장은 은과 동 두 종류로 만들었고, 정원의 표면에는 비둘기 한 쌍이 마주앉은 자세를 돋을새김하였고, 이면에는 “대한뎨국 황태자전하 가례식 긔념쟝 광무십일년 월 이십사일”이라고 횡서로 돋을새김하였다.
1907년(광무 11) 7월 18일 고종이 군국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청정(代理聽政)하게 하고, 같은 달 20일에 경운궁에서 양위식(讓位式)을 거행하였다. 그해 8월 27일 경운궁 돈덕전에서 순종 황제의 즉위식을 거행했는데 이를 기념해 즉위 기념장을 제작하였다. 재질은 은질이고, 정원형의 표면에는 황제의 서구식 군모 형태를 돋을새김하고 배경에는 복엽의 이화문으로 장식하였다. 화판에는 “즉위기념장(卽位記念章)”이라고 새겼다. 서구식 군모는 황제와 황태자가 1900년부터 착용한 서구식 군복의 모자이다. 이면에는 “대한뎨국 대황제폐하 즉위식 긔념장 융희 원넌 팔월 이십칠일”이라고 새겼다.
황제로 즉위한 순종이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남쪽으로 대구, 부산, 마산 등지를 순행하고,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평양, 의주, 정주, 황주, 개성 등지를 순행한 것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이다. 재질은 은질이고 표면에는 새로 제정한 순종의 어기(御旗)를 중앙에 돋을새김하고, 이면에는 “대한뎨국 대황제폐하 남셔순행 긔념장 융희 삼년”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대한제국기에 훈장 제도를 실시하면서 기념장 제도도 시행하였다. 기념장은 주로 국가적인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것으로 오늘날 여러 행사에서 마련하는 기념장의 선행 형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