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는 오례(五禮)에 따라 제복(祭服) · 조복(朝服) · 공복(公服) · 상복(常服) · 시복(時服)을 착용하였다.
1895년 8월 10일 대례복 · 소례복 · 상복을 제정, 반포한 뒤 대례 · 소례에 따라 대례복 · 소례복을 입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대례복으로는, 왕 · 왕세자에게는 면복(冕服)이 있었으며 조신(朝臣)들에게는 조복 · 제복이 있었다.
또, 왕비 · 왕세자빈에게는 법복(法服)이라 하여 적의(翟衣)가 있었고, 내명부(內命婦) · 외명부는 의식에 따라 나름대로의 예복이 있었다. 조선 말기 수차의 의제개혁 때마다 조신의 대례복이 지정되었다. 즉, 1894년 12월의 개혁 때는 조신의 대례복을 흑단령(黑團領)으로 하였다.
그때까지의 양관(梁冠)을 쓴 광수(廣袖)의 조 · 제복(朝祭服)이 아닌 사모를 쓴 착수(窄袖)의 상복(常服)을 대례복으로 승격시켰다. 다음해 8월 문관의 복장식(服裝式)을 반포하는 가운데, 조 · 제복은 예전대로 착용하도록 했다.
대례복은 흑단령 · 사모 · 품대(品帶) · 화자(靴子)로 하여 동가(動駕) · 경절(慶節) · 문안(問安) · 예접(禮接) 때 착용하도록 했다. 소례복은 흑반령착수포(黑盤領窄袖袍) · 사모 · 품대 · 화자로 하여 진현(進見) 때 또는 대례복 때 착용하여도 좋다고 하였다.
이것은 앞서의 개혁이 당시로서는 너무나도 급진적인 것이어서 수구파의 반발이 많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해 11월 단발할 것과 의복제도는 외국제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는 조칙(詔勅)이 내려졌다. 1897년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고종은 황제위에 올라 황제 · 황후와 황태자 · 황태자비 등의 관복을 정하였다.
황제대례복인 면복은 종전의 구류면(九旒冕) · 구장복(九章服)에서 십이류면 · 십이장복으로 바뀌었고, 황태자는 구류면 · 구장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후 · 황태자비는 재래의 적의제가 아닌 명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르게 하였다. 1900년 4월 문관복장규칙을 정하면서 대례복제식(大禮服制式)을 구미식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영국의 궁중예복을 모방한 일본의 대례복을 참작하여 만든 것이었다. 곧 가슴에서 앞섶까지 선을 활처럼 휘어 내리게 한 연미복형(燕尾服型)에 금몰(金mogol)을 넣은 것으로, 거기에는 대한제국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을 금몰로 수놓았다. 모자는 진사고모(眞絲高帽, silk top hat)였다.
때로는 황제 · 황태자도 면복 대신 이것을 착용하기도 하였으나, 구습을 존중해야 할 의식에 있어서는 옛 관복을 그대로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