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禮記)』를 보면, 크고 많고 높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하였으니, 가장 귀한 존재인 국왕의 친행 의례는 가장 크고 가장 높다. 따라서 국왕이 친히 행하는 의례는 대례이며, 행하는 일은 대사이다. 대례는 고례에 이미 잘 나타나 있으며 조선과 중국 등에서 국가 전례서의 편찬으로 이를 규범화하였다. 예치 사회를 지향한 조선에서 국왕이 친히 행하는 대례는 국가 의례이며, 이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규정되어 있다. 길례(吉禮) · 가례(嘉禮) · 빈례(賓禮) · 군례(軍禮) · 흉례(凶禮)의 오례(五禮)가 그것이다.
“나라의 법은 오직 제사가 큰 것”이라 하였으니, 대사인 제사는 그래서 대례이며, 제사가 가장 중요하였기 때문에 길례를 가장 앞에 두었다. 이 제사의 주인은 국왕이며 국왕의 제사권은 신성불가침이었으므로 국왕의 친행 의례를 왕세자나 영의정이 대신 행할 경우에는 이를 섭사(攝事)라 하였다. 왕세자나 유사(有司)가 행하는 제사, 주현의 속제도 국왕의 명에 의한 것이므로 대례라 할 수 있다.
가례는 국왕이 만민을 친히 하는 의례이다. 왕권의 절대성과 직결되는 의례들로 구성되고 그 정당성을 확보하는 순서로 정해졌다. 조회(朝會)를 통해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확고히 수립한 뒤에, 왕과 왕세자의 일생의례를 거쳐 국왕으로 즉위하기까지의 절차를 정당화하고, 즉위 후에는 인사와 교화를 중심으로 한 통치권 행사 관련 의례로 귀결함으로써, 국왕 권위의 일원적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다.
빈례는 『주례(周禮)』에서 주1을 친히 하는 것이라 했다. 곧 조정에서 번국(藩國)[제후의 나라]의 군장(君長) 및 사절을 접대하는 의식이라 하겠다. 조선에서는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의례로서 이를 제정했다. 명나라는 예로써 사대하는 관계이며, 왜와 여진 등은 교린 관계로서 명나라 사신인 조정 사신과 인국 사신을 맞이하는 의절뿐 아니라 연회를 아울러 싣고 있다. 국왕을 주인으로 하고 외국 사신을 빈객으로 하는 주-빈의 외교 관계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왕의 지위를 잘 나타낸다.
군례는 『주례』에서 나라를 동화시키는 예법이라 하였다. 화합하지 못하거나 참람하여 어긋나는 자를 임금의 위엄으로 다스려 동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대사(大師)와 전수(田狩)에서 비롯된 군례는 구일월(求日月)과 대나(大儺), 대사(大射) 등으로 확대되었다. 국내를 안녕케 하는 의례를 중심으로 제정되었으니, 각 군례는 교화의 책임자이면서 군통수권자인 국왕의 지위를 잘 보여준다.
1897년(광무 1) 9월 17일에 거행된 고종의 황제 즉위식 역시 대례로 칭하면서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를 편찬한 바 있다. 이처럼 국가의례는 대례 아닌 것이 없으며, 대례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이후 각 주6와 의궤(儀軌) 등으로 확충과 보완이 계속 이루어지다가 영조 연간에 『속오례의(續五禮儀)』, 고종 연간에 『대한예전(大韓禮典)』이 편찬되기에 이르렀다.
대례를 행할 때 국왕이 입는 복식도 대례복이라 칭하였다. 국왕의 대례복은 구장복과 면류관이다. 또 대례 후에는 국왕의 은전이나 잔치가 내려졌다. 국왕 친행의 의례 외에, 주7나 조정 사신의 연회 등은 특히 조정의 대례라고 칭했으며 이는 통례원에서 전담하였다. 가례(家禮)에서의 관혼상제도 사람의 일생에 가장 중대한 예이므로 대례라 칭해졌다.
대례는 예제의 원리에 따라 제정되었다. 국왕을 정점으로 계서화한 종법사회에서 국왕의 권위를 의례의 법적 장치를 통해 확고하게 세워 이를 시행함으로써, 대례는 백성들을 심리적 · 물리적으로 종속시키는 지배적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국왕의 고유한 대례의 권위 아래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고 국가와 사회는 이를 통해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