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관 ()

이하응 금관조복본 초상
이하응 금관조복본 초상
의생활
물품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에 쓰는 관모.
이칭
이칭
금관(金冠), 제관(祭冠)
물품
재질
휴지(休紙)|죽망(竹網)|흑초(黑綃)|먹(墨)|송연(松烟)|니금(泥金)
용도
제례|가례|길례|흉례
소장처
국립민속박물관|단국대학교석주선기념박물관|온양민속박물관
제작 시기
조선 후기
관련 의례
제례|가례|길례|흉례
내용 요약

양관은 조선시대 관리가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에 쓰는 관모이다. 이마에서부터 둥글게 머리를 덮으며, 관의 뒷면에 닿는 너비 10cm 내외의 양(梁)과 머리둘레를 싸는 무(武), 관의 뒷면을 장식하는 투조장식판인 배면(背面), 관을 고정하는 목잠(木簪)으로 이루어진다. 금관은 무와 배면, 비녀를 모두 금색으로 칠하고, 제관은 흑색으로 칠을 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품계에 따라 1품은 5량, 2품은 4량, 3품은 3량, 4․5․6품은 2량, 7․8․9품은 1량으로 양에 부착된 금선 장식의 수(數)에 차이를 두었다.

정의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에 쓰는 관모.
연원

양관의 제도는 중국 명나라의 것을 본뜬 것으로 『삼재도회(三才圖會)』의 문무관 양관을 보면, 위의 무(武)가 높고 앞의 양이 낮으며 아주 호화로왔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양관은 무가 낮고 양이 높아, 중국의 것과 같게 해야 한다는 심심치 않은 논의와 함께 중국의 양관을 모방하여 지나치게 도금하는 풍조가 한때 유행하기도 하였다.

양관은 한대(漢代) 유학자의 진현관(進賢冠)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며, 양관의 명칭이 일반화된 것은 명대(明代)이다. 우리나라에 양관이 전해진 구체적인 내용은 고려 말 공민왕 19년(1370)에 확인된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6년(1416)에 관복색(冠服色)을 설치하고 문무백관의 조복 제도를 정했는데, 이것은 명(明)의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한 이등체강(二等遞降)의 원칙을 따른 것이다. 그 후 세종대에 정비를 거쳐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완성을 보았으며, 양관은 조복과 제복에 공통으로 사용했다.

양(梁)의 숫자는 백관의 품계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태종 16년(1416) 제도에 의하면 1품은 5량관,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5․6품은 2량관, 7․8․9품은 1량관을 썼고. 왕세자는 강사포에 6량관을 썼다. 조선 초기에는 조복이나 제복에 사용되는 옷감이나 부속품을 무역해서 사용하거나, 중국에서 비단을 사다가 조복을 제조하였다. 중종대에는 중국에서 조복을 구해 중국의 제도에 맞추어 만들었고, 이두석을 만드는 방법을 익혀 오게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양관의 기록이 가장 많으며 조형적인 형태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인조 16년(1638)에는 조복 준비가 어려워 정사와 부사를 제외하고는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하다가, 영조대에는 가례 · 길례 · 흉례 등 각 의례에서 4품 이상은 조복을, 5품 이하는 흑단령으로 법제화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인조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제관이 제작되었으며, 정조대에는 조복용 금관과 제복용 제관이 구분되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국말(國末)의 『대한예전』에도 제복관은 칠을, 조복관은 금관도금으로 만들어 국말까지 준용되었다. 이후 대한제국(1897) 시기에는 명(明)과 같이 7량 제도로 바뀌었고, 현재 종묘대제에서 제관은 5량관 또는 7량관을 쓰고 있다.

형태와 제작 방식

양관은 이마에서부터 둥글게 머리를 덮으며,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관 앞면의 이마부터 머리둘레를 싸는 넓적한 띠 모양의 사각판[冠武 혹은 武], 관 뒷면의 산봉우리 모양인 장식판, 관 상부 중앙을 가로질러서 앞에서 정수리까지 둥글게 굽은 양주(梁柱)이다. 양관을 제작할 때 소요되는 의차(依次)로는 휴지(休紙) · 조주(皂紬) · 사승포(四升布) · 저사(苧絲) · 중철사(中鐵絲) · 송연(松烟) · 영다회(纓多繪) · 가차(架次) · 수영이(垂纓二) · 돈모(豚毛) · 영이팔승(纓二八升) · 명유(明油) · 봉(縫) · 먹(墨) · 탄(炭) · 석자황(石紫黃) 등이 있다.

앞면의 관무와 뒷면의 장식판은 문양을 투각한 한지를 죽망(竹網)에 붙여서 오린 후 옻칠을 하고, 금관은 그 위에 니금을 한번 더 칠한다. 양주는 관모골 위에서 죽사로 모양을 잡은 후 옻칠을 하여 얇은 흑색 비단[추사(縐紗)]으로 감싼다. 한지를 꼬아서 만든 선(線)은 1량부터 5량까지 품계에 맞게 양주 위에 부착한다. 관무는 양옆까지 돌아가서 뒷면 장식판 사이의 고리에 끼워서 고정하고, 관무 양끝 중앙 구멍에 끈을 꿰어서 머리 크기에 맞게 조절한다. 뒷면 장식판 중앙 양끝에는 비녀 구멍이 있고, 나무 비녀[목잠(木簪)]가 관을 가로질러서 관모를 고정한다. 목잠에는 딸기술 달린 끈을 달았는데, 금관에는 남색 술을, 제관에는 흑색 술을 단다. 착용할 때는 머리에 관을 쓰고 관무에 끼운 끈을 잡아당겨 조절한 후 비녀에 끈을 몇 번 감아서 턱 아래에 매어 고정한다.

양관의 관무와 뒷면 장식판에는 당초무늬와 봉황, 연꽃 등의 무늬가 관모마다 다르게 새겨져 있는데, 이것도 한지를 꼬아서 모양을 내거나, 종이에 금분을 입혀서 모양을 내기도 한다. 종선의 색상은 금색으로 한다. 금관과 제관의 차이는 금관은 관무와 양주, 량, 비녀 등을 모두 금칠을 하였는데, 제관은 경건의 뜻을 표시하여 당초무늬의 전면 중앙 부분과 목잠의 구멍 둘레만을 금칠하고 그 외는 전부 흑색으로 칠하였다. 겨울에는 관모 밑에 남바위를 받쳐서 써서 추위를 피하였다.

현황

현재까지 전해져 오는 유물은 5량관이 많으며, 정인학(鄭仁學, 1839-1919)의 6량관과 심동신(沈東臣, 1824~1889)의 5량관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관과 제관은 장영직(1861~1944)의 유품으로 고종 22년(1882년) 통례원 정3품의 관직에 맞는 5량관이다. 이외에도 경상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박해용(朴海容 1885~?)의 6량관,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5량관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석주선, 『冠帽와 首飾』(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1993)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 복식·자수편』 2(문화재청, 1997)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祭器樂器都監儀軌』(서울대학교 규장각, 2002)
최은수·정미숙, 『관모장-서울시무형문화재 50호-』(서울특별시, 2018)

논문

강순제, 「冠帽 硏究 Ⅲ」(『카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논집』, 16-1, 1996)
박성실, 「大司憲 鄭寅學(1839-1919)의 六梁冠 小考」(『대한가정학회지』 44-1, 2006)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https://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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