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개항기에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전통복(傳統服)의 개량화는 여성복에서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개화사상(開化思想)과 서구 기독교 유입 등에 의한 여성 의식 개혁의 결과로 볼 수 있으며, 기독교 전도부인의 옷과 여학생의 교복을 통해서 나타났다. 여성 계몽 단체인 여자교육회에서는 여성 교육을 실시하였고, 신문화운동(新文化運動)의 물결을 타고 여자 복장을 개량하여 행동을 자유롭게 하라는 건의서를 정부에 내기도 하였다. 이는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고, 치마를 통치마로 만들면서 길이는 짧게 하자는 것이었다. 1907년(광무 11)에 정부에서 마침내 이를 허락하자 여성 개량복은 신여성과 학생을 중심으로 차츰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전통적인 긴 치마를 통치마로 개량하는 것은 1907년 『제국신문(帝國新聞)』의 논설에 제의된 바 있다. 한복 치마의 어깨허리는 1911년 이화학당(梨花學堂)의 교사 월터(A. J. Walter)와 파이(O. F. Pye)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것은 긴 치마의 허리끈이 풀어져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고 가슴을 압박하는 등 위생과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어깨허리가 부착되고 길이도 짧아진 통치마 개량복은 그 후 1914년 이화학당 체육 수업에도 사용되었으며 곧 일반 여성의 치마에까지 유행하게 되어 일상복으로도 확대되었다.
통치마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전통치마와 같이 길이가 발등까지 내려왔으나, 1920년대 들어오면서 점차 통치마 길이가 짧아지면서 종아리가 드러나 보이게 되자 ‘깡통치마’라 불렀다. 통치마에 멋을 부려 서양복의 플리츠 스커트처럼 치마 주름이 굵직하게 치맛단 끝까지 내려오도록 눌러서 다려 입기도 하였다. 단 윗부분을 넓게 접는 접음단 장식을 한 통치마나, 단 부분에 흰 선을 두르는 치마가 나오기도 하였다. 길이가 짧은 통치마는 양말이 보급되면서 유행이 가속화되었다. 통치마에는 버선 또는 양말을 신었는데, 발의 노출을 꺼리는 기존 관습에 비추어볼 때 발목이 보이는 짧은 통치마의 등장은 획기적이어서 신여성(新女性)과 여학생의 짧은 통치마 차림은 종종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신의 경우 고무신과 양화(洋靴)가 병행되었다. 태평양 전쟁 시기인 1943년에는 부인들의 치마까지 통치마로 만들어 입자는 운동이 일본 고관 부인들의 모임인 대일본부인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대일본부인회에서는 치마는 통치마로, 저고리는 옷고름 대신에 단추를 사용하자고 권장하였으며, 이 운동을 철저히 이행하기 위해 애국반상회(愛國班常會)에서 협의하여 실행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신생활 장려 추진회에서 통치마를 장려하였다. “남자는 노-타이샤쓰, 여자는 통치마!”라고 하여 여름 복장의 기준을 마련하였다. 통치마와 함께 동정과 깃을 생략한 적삼을 간이복으로 제안하였다. 6 · 25 전쟁 때 부산에서 구호품과 밀수품이 성행하면서 비로도로 만든 통치마가 멋쟁이의 상징이 되었다. 농촌의 아주머니들도 나들이할 때에는 양단 저고리에 비로도 치마를 입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벨벳이 고급 옷감으로 귀하게 여겨져 혼수용 벨벳 치마가 유행하였다. 한편, 어린이용 치마는 대부분 통치마로 되어 있어서 활동하기에 매우 편리하여 현재까지도 대부분 통치마로 제작된다.
통치마는 20세기 초 서양 문물의 유입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변화가 전통 한복 치마에도 적용되어 조끼허리와 치마의 트임을 막는 특징이 절충된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치마이다. 여학교 교복으로 사용되면서 널리 보급되었으며, 1920년대 여학생이나 신여성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기도 하였다. 보수적인 사고관을 가진 부인들은 실용적인 통치마를 겉에 입지는 않았으나 속치마로 입기도 하였다. 1980년대 이후 양장(洋裝)에 밀려 사라졌으나 개량운동의 하나인 신생활 수립과 구습타파, 의복 개량 등의 논제로 시작된, 폭을 줄이고 자락을 막는 통치마는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한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