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는 3 · 1운동이 촉발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기 때문에 교단 지도층 인사들이 거의 모두 검거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가 1919년 8월에 문화정치를 시행한다고 발표하자, 이에 발맞추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천도교내에서 일어났다.
이리하여 1919년 9월에 이돈화(李敦化), 박래홍(朴來弘), 정도준(鄭道俊) 등의 발기로 ‘천도교리의 연구, 선전과 조선 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목적으로 내건 천도교 청년교리강연부(靑年敎理講硏部)라는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청년단체가 바로 1920년대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3월 청년교리강연부는 그 이름을 천도교청년회로 고치고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청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 청년회의 편집부 사업으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종합잡지 『개벽』이 창간되었다.
청년회가 주축이 된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은 『개벽』 이외에 『신여성』 · 『어린이』 · 『학생』 등의 월간잡지 출판사업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또한 체육부의 사업으로 야구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1년 4월에는 청년회의 소년부를 천도교소년회로 조직하여 ‘어린이의 정서함양과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1922년 5월 첫 일요일을 ‘어린이날’로 제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천도교청년회가 선도하던 신문화운동은 1923년 천도교청년회가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천도교의 전위체로서 천도교청년당이 설립되면서 농민운동과 노동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먼저 1925년 당임시총회에서 천도교청년당은 농민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10월에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를 설립하였다.
농민대중의 현실적 불안에 대한 생활권 확보와 의식적 훈련, 그리고 농민대중의 공고한 단결을 강령으로 하는 조선농민사는 『조선농민』 등 월간잡지와 「비료제조법」 · 「양잠법」 등 농촌문고본을 보급하고, 각종 강연회나 야학을 운영하였다. 또한 농촌일용품을 공동구입하고 생산물을 위탁 또는 공동 판매하는 농민공생조합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9년 5월에는 천도교 유일의 노동운동기관이었던 조선노동사(朝鮮勞動社)가 서울에서 결성되었다. 이것은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100일간 벌어졌던 이른바 원산총파업에서 자극을 받은 것으로, 조선사회도 점차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고 있으므로 노동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음을 절감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전시체제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제한적으로나마 허용하던 합법적인 사회활동의 공간마저 완전히 차단하고 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천도교의 신문화운동도 역시 탄압을 받아 각종 출판물들이 폐간되었고, 집회와 조직활동이 금지되는 등 더 이상 명맥을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점차 쇠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