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우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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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단체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천도교 비밀결사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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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천도교 비밀결사단체.
내용

이 조직은 처음에 평양의 천도교종리원(天道敎宗理院)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48년 2월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방북을 찬성하는 내용의 민족통일방안을 담은 선언문을 작성하고 3월 1일을 기해 통일시위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던 3·1절 재현운동이 북한 당국의 탄압으로 제지당하고 주모자들이 검거 투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북한 지역의 천도교 조직이 거의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1948년 4월 29일에 북한의 독신 교인들만으로 비밀조직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일을 기해서 장세덕(張世德), 이세정(李世正), 윤문원(尹文元), 김성흔(金聖昕), 김상열(金商說), 장기초(張基礎), 장근영(張根榮) 등 7인이 영우회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 후 영우회 조직은 북한 전역에 급속도로 확대되어, 1년 뒤인 1949년 5월 1일에는 20만3607명이 이 조직에 가입하였고, 1950년 5월에는 40만7214명으로 그 인원은 더욱 늘어났다. 참고로 북한 지역의 천도교인은 총 286만6300명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그런데 영우회는 1950년 4월경에 북한 당국에 발각되고 말았다. 6·25전쟁 중 평양 감옥 지하실에서 영우회의 주모자 165인이 비밀재판을 받았는데, 그 판결문에서 북한 당국은 영우회가 “천도교의 종파적인 편견에서 미제의 괴뢰 리승만 도당의 내란 도발 흉책과 함께 무장 폭동의 방법으로서 공화국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라고 규정하였다. 이 사건으로 평양 감옥에서는 영우회의 주요 간부 165인이 처형당하였고, 각 지방에서도 수많은 검거, 투옥,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나 영우회는 방대한 계보로 이루어지면서도 비밀조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6·25전쟁의 와중에 많은 조직원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에는 앞서서 촌락을 점거하고 자체적으로 치안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중국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면서 수십만의 교인들이 월남하면서 그 활동도 소멸되었다.

참고문헌

『영우회비사』(동학영우회, 1989)
『천도교 운동사』(홍장화, 천도교중앙총부, 1992)
집필자
조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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