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는 1897년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道統)을 전수받은 뒤, 1901년에 세계 문명의 대세를 직접 확인하고 동학의 앞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1903년에 동학의 교세가 점차 늘어나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 기운이 감도는 등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일본에 있던 손병희는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어 진보회(進步會)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조정에 개혁을 촉구하는 갑진개화혁신운동(甲辰開化革新運動)을 전개토록 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그는 1903년 중춘(仲春)에 동학의 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두령제를 설정하였다. 이것은 교단 내의 주요 접주(接主)들에게 대두령의 직위와 칭호를 부여함으로써 위계질서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손병희는 이에 관한 경통(敬通)을 발표하고, 임명된 각 접주들에게 첩지(帖紙)을 발송하였다. 이에 따르면, “우리 각 두목들은 다만 접주로만 부르나 지금에 이르러 사세가 불가불 차례를 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고로 십만원장(十萬員長)으로부터 만원지장(萬員之長)에 이르기까지 단연코 명칭의 구별이 없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비로소 넉자의 이름을 주니 이 어찌 지공정대(至公正大)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각각 그 대두령 명칭의 첩지와 도서부절(圖署符節)의 법식을 좌(左)와 같이 하여 규절을 잘 지키기를 바라노라……”
그리고 십만 명의 동학교도를 책임지는 자를 수청대령(水淸大領), 오만 명의 교도를 책임지는 자를 해명대령(海明大領), 만 명의 교도를 책임지는 자를 의창대령(義昌大領)이라 칭하였는데, 이 명칭의 첫글자는 교조들의 호인 수운(水雲), 해월(海月), 의암(義菴)에서 따온 것이었다.
수청대령에는 이용구(李容九)가 임명되었고 해명대령의 자리는 보류되었으며, 의창대령에는 이겸수(李謙洙), 박영구(朴永九), 나인협(羅仁協), 문학수(文學洙)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수청대령에 임명받은 이용구가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에 가담하여 친일의 길을 걷게 되자, 손병희는 교도들을 수습하고자 교단의 재조직에 착수하였다.
결국 1905년 12월에 동학은 천도교로 그 명칭을 변경하였고, 새로 제정한 천도교대헌(天道敎大憲)에 따라 교단조직도 이원화하여 연원제의 전통을 이어받는 정신적 교화기관으로서 도령제(道領制)를 신설하고 행정기관으로서 중앙총부(中央總部)를 건설하는 등 일대혁신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