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반 청년이 지향해야 할 가치의 핵심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거나 청년다운 정열과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진보적·적극적 청년 담론이 제기되었다. 급진적 경향은 일반 청년 사이에도 급속히 확산되었다. 진보적 청년들은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를 열고 청년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천도교 청년들 사이에 천도교 전위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천도교 청년들은 1920년대 전개된 문화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체적 실천 방안으로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조선 문화의 기본 조사에 착수하였으며, 이어 민족적 중심 세력의 단결을 주장하였다. 또한 천도교 청년들은 천도교 이념을 표준으로 하는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선전적 단체’인 천도교청년회를 해체하고 천도교를 이끌어 갈 청년들을 교양·훈련하여 천도교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실현시킬 새로운 단체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천도교 청년들은 천도교의 주의·목적을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전위조직으로 천도교청년당을 창립하였다.
3·1운동 이후 천도교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교단을 이끌어가기 위해 1919년 9월 2일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天道敎靑年敎理講硏部)를 설립하였다. 1920년 4월 25일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를 천도교청년회(天道敎靑年會)로 변경하였으며, 다시 발전적 해체를 통해 1923년 9월 2일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을 창립하였다. 설립자는 조기간, 이돈화, 김기전, 정도준, 이병헌, 계연집, 박달성, 김옥빈, 김병준, 박래홍, 이두성, 이종린, 홍일창 등이다.
1925년 6월 천도교단이 신구로 분화되자 천도교청년당도 신파는 천도교청년당, 구파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으로 분화되었다. 1930년 12월 신구 천도교단이 합동하자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도 합동하여 1931년 2월 16일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을 창당하였다.
1932년 4월 천도교단이 재분화됨에 따라 천도교청우당은 신파의 천도교청년당과 구파의 천도교청년동맹으로 다시 분화되었고, 전시체제기인 1939년 4월 3일 천도교청년당이 해체되었다. 해방 후 천도교청우당으로 부활하였지만 1948년 해체되었고, 현재는 천도교청년회가 그 맥을 잇고 있다.
천도교청년당은 천도교가 있는 지방에 150여 개의 지방당부를 설치하였으며, 미주 하와이, 중남미 쿠바,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 등 해외 지역에도 당부를 설치한 바 있다.
천도교청년당은 천도교의 주의 목적을 사회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유기체로 조직되어 유소년부·학생부·청년부·여성부·농민부·상민부·노동부 등 7개의 부문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천도교소년회, 천도교사월회(천도교학생회), 천도교청년회, 천도교내수단, 조선농민사, 조선노동사 등 부문 단체를 설립하여 대중문화운동을 이끌어 갔다. 기관지로 『당성(黨聲)』을 발행하였다.
천도교청년당은 천도교의 전위 단체로 설립되어 천도교를 사회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