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1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문경(文卿), 이조판서를 지낸 김보현의 아들이다.
1841년 감시초시와 1871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림(翰林)·교리(校理)·헌납(獻納)·직각(直閣)·장령(掌令)·문학검상(文學檢詳)·응교(應敎)·병조정랑(兵曹正郞)·사복정(司僕正) 등을 역임했다.
1876년 정3품으로 승진하여 예조참의·승지·대사성·이조참의·겸보덕(兼報德)·돈녕도정(敦寧都正)을 거쳐 종2품으로 승진하여 예조참판·동춘추(同春秋)·부총관·지의금(知義禁)·동경연(同經筵)·동성균(同成均)·한성우윤(漢城右尹)·이조참판·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886년 정2품으로 승진하여 형조판서·한성판윤·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사직제조(社稷提調)·우참찬·지돈녕(知敦寧)·사역원제조(司譯院提調)·평시제조(平市提調)·이조판서·내의원제조(內醫院提調)·장례원경(掌禮院卿)이 되었다. 1900년 종1품으로 승진하여 홍무관학사(弘文館學士)·시종원경(侍從院卿)·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고 1910년 관직을 은퇴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일제강점 직후 한일병합에 협력한 공로로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의해 일본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2만 5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2월 작기 분서 봉수식에 참석했으며, 8월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3년 사망 당시에는 정4위에 이르렀다. 1923년 3월 사망했다.
김영철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80∼48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