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음성(陰城). 증조는 공부상서 박재(朴榟)이고, 할아버지는 전리총랑 박현계(朴玄桂)이며, 아버지는 군사(郡事) 박문길(朴文吉)이다.
1388년(우왕 14) 도평의사사지인(都評議使司知印)으로 요동 정벌군에 종사하다가 위화도회군에 관련된 이성계(李成桂)의 글을 우왕에게 전했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태조가 여러 왕자를 죽이고 즉위한 태종을 미워해 함흥에 머물러 있자 태종은 사자를 여러 번 보내 태조의 귀환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문안사(問安使)로 파견된 사람 중에서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 태종이 신하들에게 “누가 가겠는가.”라고 하자 오직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인 박순이 자청하고 나섰다.
박순은 하인도 없이 망아지가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갔다. 이윽고 태조가 있는 곳에 이르러 일부러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놓고 어미 말만 타고 가니 어미 말이 가지 않으려 하였다.
태조는 말의 행동이 이상해 그 까닭을 물으니 “새끼 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놓았더니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짐승일망정 지친(至親)의 정이 있는 모양입니다.”하고 비유해 대답하니 태조가 슬퍼하였다.
함흥에 체류하던 어느 날 태조와 함께 장기를 두고 있을 때 마침 쥐가 새끼를 껴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이었는데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때 박순은 장기판을 옆으로 치우고 태조의 귀환을 간곡히 청하였다. 이에 태조도 한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였다.
귀로의 길에 오르자 태조를 모시는 신하들이 박순을 죽일 것을 요청하였다. 태조는 박순이 용흥강(龍興江)을 건너갔으리라 생각해 신하들의 청을 승낙하면서 강을 건넜으면 쫓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순은 급병으로 중도에서 지체하다가 겨우 배에 올랐으므로 살해되고 말았다.
태종은 박순의 공을 기록하게 하고는 관직과 토지를 내리는 한편 자손의 등용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부음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임씨(任氏)에게 묘지를 내렸으며, 고향에 충신·열녀의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시장(諡狀)을 지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