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음성(陰城)이다. 증조는 공부상서(工部尙書) 박재(朴榟)이고, 할아버지는 전리총랑(典理摠郎) 주1이며, 아버지는 문하시랑(門下侍郞) 박문길(朴文吉)이다. 박순의 부인 장흥임씨(長興任氏)는 대사헌(大司憲) 임헌(任獻)의 딸이다.
출생연도와 젊은 시절의 행적은 밝힐 근거가 없다. 1388년(우왕 14), 도평의사사 지인(都評議使司知印)으로서 요동정벌군에 종군하였다가 이성계(李成桂)의 명으로 회군을 요청하는 장계를 우왕에게 전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 수령관(首領官), 사헌중승(司憲中丞), 승추부 경력(承樞府經歷), 상장군(上將軍), 상호군(上護軍) 등의 무관직을 거쳤다.
1402년(태종 2) 11월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키자 상호군으로서 왕명을 받아 동북면으로 가서 반란에 동참하지 않도록 주변 고을을 설득하였으나, 반란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박순이 함흥차사(咸興差使)로 갔다가 피살되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박순의 부인 임씨의 묘표(墓表)에 비로소 보이고, 민정중(閔鼎重)이 박순의 시호를 받기 위해 지은 청시행장(請諡行狀)에서 인용된 이후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선 전기의 관찬 역사서와 여타 기록에 보이지 않아 역사적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호를 내릴 당시에 논란이 일었으나, 그가 나라의 환란에 처해 순절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였으므로 시호는 그대로 내려졌다.
1686년(숙종 12)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737년(영조 13) 그가 순절한 영흥(永興)의 용흥강(龍興江) 주2에 용강서원(龍江書院)을 건립하여 그를 향사(享祀)하였다.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의 관직은 사후에 증직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