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태조 7) 제1차왕자의 난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두 아들 방번(芳蕃)·방석(芳碩)과 정도전(鄭道傳) 등 심복을 잃은 태조는 상심하여 정사에 뜻을 잃고 정종에게 양위하였다.
이어서 1400년(정종 2) 제2차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芳遠)에게 환멸을 느낀 그는 1401년(태종 1) 고향 함흥으로 갔다. 태종은 평소 태조가 신임하던 성석린(成石璘)을 보내어 그해 4월에 겨우 데리고 왔으나, 1402년 11월 다시 함흥으로 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태종은 태조에게 문안하고 서울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差使)를 보냈다. 야사에서는 함흥으로 간 차사들이 태조에게 죽음을 당해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하는데, 이로 인해 한번 떠났다가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함흥차사’라 부르게 되었다. 하지만 문헌에는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의 희생만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순도 『태종실록』에는 그 달에 강비족속(康妃族屬)인 조사의(趙思義)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선무(宣撫)하다가 함주의 군중(軍中)에서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뒤 태조는 여러 차례의 간청에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다가, 그 해 12월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찾아가자 서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