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남양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우(景遇)
지족당(知足堂)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05년(연산군 11)
사망 연도
1568년(선조 1)
본관
안동(安東)
주요 관직
남양부사|동지중추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전기에, 남양부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우(景遇), 호는 지족당(知足堂). 권효량(權孝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상(權詳)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권희맹(權希孟)이며, 어머니는 여한경(呂漢卿)의 주1

생애 및 활동사항

1525년 생원시에 주2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주3하였다. 1530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된 뒤 지평 · 정언 · 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고, 1535년 홍문관교리 · 장령을 거쳐 1538년 사인(舍人)이 되었다. 이때, 절영도왜변(絶影島倭變)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이 사건이 성달순(成達順) 등에 의해 조작된 허위임을 밝히고 그 일당을 처벌하도록 주4

이듬해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부제학 · 우부승지 · 좌승지를 거쳐, 1542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3년 형조참판, 이듬해 병조참판 ·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46년(명종 1)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이듬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때에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 · 송인수(宋麟壽) 등의 일파로 몰려 순천에 귀양갔다가 바로 평안도 맹산으로 옮겨졌다. 1553년 풀려나와 1561년 남양부사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기사전문록(乙巳傳聞錄)』
『가정4년을유2월21일생원진사시방목(嘉靖四年乙酉二月二十一日生員進士試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貴 379 1522])
주석
주1

본관 및 가계 : 『국조문과방목』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2

생원 급제 : 『가정4년을유2월21일생원진사시방목(嘉靖四年乙酉二月二十一日生員進士試榜目)』(고려대학교 도서관[만송 貴 379 1522])

주3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六(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주4

절영도 왜변 조사 : 『중종실록』 89권, 1538년(중종 33) 12월 16일. "삼공이 경차관을 많이 내보냄의 폐단에 대하여 건의하자, 모두 옳다고 답하다"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