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우(景遇), 호는 지족당(知足堂). 권효량(權孝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상(權詳)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권희맹(權希孟)이며, 어머니는 여한경(呂漢卿)의 딸이다.
1519년(중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0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가 된 뒤 지평·정언·시강관(侍講官)을 역임하고, 1535년 홍문관교리·장령을 거쳐 1538년 사인(舍人)이 되었다.
이때, 절영도왜변(絶影島倭變)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이 사건이 성달순(成達順) 등에 의해 조작된 허위임을 밝히고 그 일당을 처벌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부제학·우부승지·좌승지를 거쳐, 1542년에는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43년 형조참판, 이듬해 병조참판·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546년(명종 1)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이듬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때에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송인수(宋麟壽) 등의 일파로 몰려 순천에 귀양갔다가 바로 평안도 맹산으로 옮겨졌다. 1553년 풀려나와 1561년 남양부사를 지내고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