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회군 ()

고려시대사
사건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이칭
이칭
무진회군(戊辰回軍)
사건/전쟁
발발 시기
1388년 5월 22일
종결 시기
1388년 6월 3일
발발 장소
위화도, 개성
관련 국가
고려, 명
관련 인물
이성계, 최영, 우왕, 창왕, 조민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위화도회군은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우왕 재위 기간 내내 고려와 명나라는 갈등을 겪었는데, 1388년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하자 고려는 요동 정벌을 결정하고 5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군대를 이끌었던 이성계는 정벌 자체에 반대하였고, 출진 이후에도 정벌을 중단하자고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단독으로 회군해 개경을 공격하여 우왕과 최영을 축출하였다.

정의
1388년(우왕 14),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던 이성계(李成桂)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
배경 및 발단

위화도(威化島)는 의주의 압록강 하류에 있는 섬이다. 1374년(공민왕 23) 공민왕 시해 사건과 명사 살해사건(明使 殺害事件)으로 고려와 명나라의 관계는 크게 막히게 되었다. 명나라는 우왕 책봉의 조건으로 막대한 양의 공물을 보내올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 문제는 1385년(우왕 11)에 대체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387년(우왕 13)에 명나라가 당시 요동에 자리 잡고 있던 몽골 제국의 잔여 세력인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의 항복을 받아 내고서는 곧이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여 철령 이북, 옛 원나라에 소속되어 있었던 인호(人戶)들을 직접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에서 관할하겠다고 통고해 왔다.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불만이 쌓여 가던 고려 정부는 철령위 설치 통고에 크게 반발하여 요동 정벌군을 일으켰다.

경과 및 결과

요동 정벌은 우왕과 당시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최영(崔瑩)이 주도하였다. 이때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4불가론(四不可論)을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의 강력한 주장으로 정벌은 실행에 옮겨졌다.

1388년 4월, 우왕은 평양(平壤)에 머물면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최영은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전군을 지휘하고, 조민수(曺敏修)는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서 양광도‧경상도‧전라도‧계림‧안동 등지의 군사를 이끈 13명의 원수를 휘하에 거느리며, 이성계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안주도‧동북면‧강원도의 군사 및 자신의 친병(親兵)을 이끄는 17명의 원수를 거느리는 것으로 편제되었다. 이때 동원된 병력은 좌 · 우군 3만 8,830명과 겸군(傔軍) 1만 1,600명 등 총 5만 464명, 그리고 말 2만 1,682필이었다. 당초에는 최영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설 계획이었으나, 우왕의 강력한 만류로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주둔하며 독전하기로 하였다. 4월 18일에 이성계와 조민수가 좌 · 우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이들이 위화도에 도착한 것은 5월 7일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도망치는 군사가 속출하였고, 이에 이성계는 두 차례 더 회군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우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마침 큰비가 내려 압록강을 건너기가 어렵게 되었고, 결국 5월 22일에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한 후 독단으로 회군을 결정하였다.

회군 소식을 들은 우왕과 최영은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와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성계가 이끈 군사들은 10일만인 6월 1일에 개경 인근에 도착하여 주둔하였다. 6월 3일에 개경에 진입한 이성계 군은 최영이 직접 이끈 수비군을 제압하고 그를 체포하였다. 결국 최영은 고봉현(高峰縣)으로 유배되었고, 6월 8일에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었다.

의의 및 평가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치적‧경제적‧군사적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다. 이어서 1392년 이성계는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위화도회군은 왕조 교체의 발단이 되었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이상백, 『이조건국의 연구』(을유문화사, 1949)

논문

강지연, 「위화도회군과 그 추진세력에 대한 검토」(『이화사학연구』 20, 21, 이화여자대학교 사학연구소, 1993)
김당택,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제도개혁」(『전남사학』 24, 전남사학회, 2005)
김정의, 「위화도회군에 관한 고찰」(『군사』 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1988)
박천식, 「무진회군공신의 책봉전말과 그 성격」(『전북사학』 3, 전북대학교 사학회, 1979)
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개경 전투」(『국학연구』 20, 한국국학진흥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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