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가 북원(北元)을 치려고 사신 임밀(林密)과 채빈을 보내서 제주의 말 2,000필을 요구하였다. 고려에서는 문하 평리 한방언(韓邦彦)을 제주에 보내 말을 모으게 하였다.
그러나 제주의 목호(牧胡)주 01)들이 “원나라의 적인 명나라에 말을 보낼 수 없다.”라고 하며 말의 공출을 거부하고 300필만 내놓았다. 명나라 사신들은 한방언을 처벌하라고 요구하면서 “제주의 말이 2,000필에 차지 않으면 황제가 우리들을 죽일 것이므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주장하였다.
왕은 최영(崔瑩) 등에게 군사 2만 5,000여 명으로 제주를 토벌하게 하자, 임밀과 채빈은 할수없이 말 300필만 끌고 돌아갔다. 명나라 사신을 호송하던 김의는 개주참(開州站 : 鳳凰城)에 이르자, 채빈과 그 아들을 죽이고 임밀을 붙잡아 갑사(甲士) 300명과 공마(貢馬) 200필을 이끌고 홍복원의 장수 나하추(納哈出)에게로 달아났다
이 명나라 사신의 살해사건은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복잡한 외교관계를 자아내게 하였다. 명나라는 고려의 사신을 잡아가두기도 하고, 공민왕이 살해된 사건을 들어 고려를 책망하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려가 북원과 통하는 사실에 대해 크게 시기하고 의심하여, 1379년(우왕 5)에는 “죄가 없는 사신을 죽인데 대해 집정대신(執政大臣)이 내조(來朝)할 것”과 “금년에 공마(貢馬) 1,000필을 보내고 내년부터는 해마다 금 100근, 은 1만 냥, 양마(良馬) 100필, 세포(細布) 1만 필을 보낼 것”을 요구하고, 이행하지 않으면 전함 수천과 정병 수십만으로 치겠다고 위협해왔다.
이러한 명나라의 고압적 태도는 그 뒤에도 오래 계속되어 사신의 살해에 대한 감정과 고려가 북원과 통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