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황제 홍무제(洪武帝)가 철령위 설치를 지시한 것은 1387년(우왕 13) 12월이었고, 고려에 이 소식이 처음 전해진 것은 1388년(우왕 14) 2월이었다. 고려는 즉각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철령 북쪽부터 공험진(公嶮鎭)까지가 오랫동안 고려의 영역이었음을 주장하며, 철령위 설치를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관원을 두고 역참(驛站)을 설치하는 등 준비 작업을 계속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철령위를 설치한 명나라 측의 의도는 옛 쌍성총관부 소속의 인호를 관할하겠다는 것이지, 그 영토를 장악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는 명이 고려의 영토 일부를 차지하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그해 4월부터 우왕은 직접 평양에 머물면서 전국에서 군사를 동원하며,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都統使)로, 조민수(曺敏修)와 이성계(李成桂)를 각각 좌군도통사와 우군도통사로 삼아 이른바 요동 정벌을 준비하였다. 『 고려사』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총 병력은 3만 8830명, 시종이 1만 1634명, 말이 2만 1682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 정벌은 중단되었다.
명나라는 건국 초에 요동으로 진출하며 몽골제국의 유산을 승계한다는 취지에서, 과거 쌍성총관부 소속의 인호까지를 장악하고자 철령위를 설치하였다. 한편 앞서 공민왕 대에 쌍성총관부의 영역과 인호를 장악한 고려는 이러한 명나라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려와 명은 그 직전까지 명나라 측의 무리한 공물(貢物) 요구 등으로 오랫동안 갈등을 겪어 왔다. 명의 철령위 설치 시도는 양국 관계를 대규모 군사적 충돌 직전까지 악화시켰으나, 결국 위화도회군으로 사태는 봉합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 역시 고려의 강경한 자세를 확인하고 철령위의 치소를 요동으로 옮기며 기존의 주장을 철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