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首相)으로서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국왕을 보좌하며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고, 판이부사(判吏部事)를 겸임하여 인사 행정을 관할할 목적으로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재신(宰臣)으로 설치하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은 국왕을 보좌하는 수상으로서 백관을 통솔하였다. 최상위 재상(宰相)으로서 재추회의 등에서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였고, 판이부사를 겸직하여 인사 행정을 관할하였다.
3성(三省)의 장관인 중서령(中書令), 문하시중, 상서령(尙書令) 가운데, 중서령과 상서령은 종실(宗室)이나 재상에게 주는 명예직이나 치사직(致仕職) 또는 추증직(追贈職)으로 운영된 반면에, 문하시중은 실무직으로 운영되어 명실상부한 고려의 최고 관직인 수상이었다. 지위가 높아 항상 임명된 것은 아니었고 결원인 경우도 많았다. 중서문하성의 재신은 6부(六部)의 판사(判事)를 겸직하여 해당 관부를 관할했는데, 문하시중은 이부(吏部)의 판사를 겸직하여 문반(文班)의 인사를 관할하였다.
신료 중에 지위가 가장 높았으므로 복무에 대한 경제적 대가도 가장 많았다. 문종(文宗) 대를 기준으로 보면 전시과(田柴科)는 제1과 전(田) 100결(結), 시(柴) 50결을, 녹봉은 제1과 400석을 받았다. 명종(明宗) 대에 제정된 백관의종(百官儀從)에서 구사(丘史)의 수도 22인으로 가장 많았다.
문하시중은 고려 초기 광평성(廣評省)의 장관인 광평시중(廣評侍中)과 내의성(內議省)의 장관인 내의령(內議令)을 계승한 것으로, 982년(성종 1) 중국 제도를 수용하여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을 설치 운영하면서 처음으로 두었다. 1061년(문종 15) 내사문하성을 중서문하성으로 개편하였으나 문하시중은 그대로 두었다. 문종이 품계를 종1품, 정원을 1인으로 정하였다. 중서문하성의 실질적인 장관이었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압박으로 중서문하성에 상서성(尙書省)을 병합하여 첨의부(僉議府)로 개편하면서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고치고 정원을 좌 · 우 각 1인으로 늘렸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해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의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쳤다가, 충선왕이 퇴위하면서 중찬(中贊)으로 복구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정승(政丞) 1인으로 고쳤다. 1330년(충숙왕 17) 충혜왕(忠惠王)이 즉위하여 중찬으로 고쳤으나, 얼마 뒤 좌정승(左政丞) · 우정승(右政丞)으로 고쳤다.
1354년(공민왕 3) 도첨의시중으로 고쳤으며 이어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바꾸었다.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反元改革)의 일환으로 문종 관제를 복구하면서 중서문하성에 문하시중 ·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을 두었다. 1362년(공민왕 11) 도첨의부(都僉議府)의 첨의우정승(僉議右政丞) · 첨의좌정승(僉議左政丞)으로 고쳤다가 이듬해 첨의우시중(僉議右侍中) · 첨의좌시중(僉議左侍中)으로 개칭하였다. 1369년(공민왕 18) 문하부(門下府)의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으로 고쳤고 창왕(昌王) 때 문하시중 ·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고쳤다.
문하시중은 국왕을 보좌하며 수상으로서 백관을 통솔하였다. 재상으로서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였고, 판이부사를 겸직하여 문반의 인사를 관할하였다. 중서령과 상서령이 명예직이나 치사직, 추증직으로 운영된 것과는 달리, 문하시중은 실질적인 고려의 최고 관직으로 운영되었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