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문하성의 후신이다. 1275년(충렬왕 1)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쳐져 첨의부(僉議府)로 일원화되었다가, 그 뒤 1293년(충렬왕 19)에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가 되고, 1356년(공민왕 5) 때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으로 환원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도첨의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후 1369년(공민왕 18) 문하부가 되었다.
이 때 관원으로는 영문하(領門下), 문하좌·우시중(門下左右侍中),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좌·우산기상시(左右散騎常侍), 좌·우간의대부(左右諫議大夫), 문하사인(門下舍人), 좌·우사간(左右司諫), 문하녹사(門下錄事), 문하주서(門下注書) 등이 있었다.
문하부는 조선시대 그대로 계승되어 한동안 존속하다가 1401년(태종 1) 7월 의정부와 그 기능이 중복된다고 하여 혁파되었다.
이 때 문하부를 혁파하게 된 것은 문하부가 백규(百揆)의 서무를 총괄하는 최고아문이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의정부에 그 실권을 빼앗기고 명목상의 존재로 떨어진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하부가 최고아문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다하지 못한 것은 고려말 이미 의정부의 전신인 도평의사사에 그 실권이 넘어가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