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 고려시대 종1품 수상직으로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이다. 도첨의시중, 첨의중찬, 도첨의중찬, 도첨의정승, 문하시중, 정승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집사성의 중시를 시중으로 고쳐 불렀고, 태봉에서도 광평성의 장관을 시중이라고 불렀다. 고려 성종 때에 내사문하성과 동시에 설치되었다. 종친에게 수여되는 종1품의 명예직이나 치사직, 증직과는 유일한 실직이었다. 원나라의 압박으로 첨의중찬으로 격하되었는데 1356년에 문하시중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 문하부가 의정부에 병합되면서 좌·우시중으로 되었다가 좌·우의정으로 이어졌다.
중서문하성의 최고 관직이다. 재상직의 통칭이며, 고려 후기에는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이라고도 하였다.
본래 중국 진 · 한대(秦漢代)에 천자를 시종하는 하급관으로 두어졌다. 남북조시대 이후 문하성의 대신(大臣)으로서 상서성의 상서령, 중서성의 중서령(中書令)과 함께 재상(宰相)이 되어 국정을 주재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에서 747년(경덕왕 6)에 집사성(執事省)의 중시(中侍)를 시중으로 고쳐 불렀고, 태봉에서도 최고정무기관인 광평성(廣評省)의 장관을 광치나(匡治奈)로 했다가 뒤에 시중으로 고친 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때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의 설치와 동시에 처음 두어졌으며, 문종 때 정원 1인, 종1품 관직으로 정해졌다. 같은 종1품 직인 중서령 · 상서령이 주로 종친에게 수여되는 명예직이거나 치사직(致仕職) · 증직(贈職)이었으므로, 유일한 종1품 실직으로서 명실상부한 수상직이었다.
판이부사(判吏部事) · 감수국사(監修國史) · 태자태사(太子太師) 등의 관직을 예겸(例兼)하였다. 결원일 때에는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등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겸하면서 수상직을 대행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압력으로 고려의 관제가 격하, 개편될 때, 중서문하성이 첨의부(僉議府)로 되면서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바뀌고, 정원도 좌 · 우 각 1인으로 늘어났다.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즉위해 관제를 개혁하면서,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되었다가, 곧 도첨의중찬으로 환원되었다.
1308년(충선왕 복위년)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바뀌면서 1인으로 감축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다시 중찬으로 되었다가, 뒤에 정승으로 고쳐지면서 좌 · 우 각 1으로 늘어났다. 1354년(공민왕 3) 시중으로 바뀌었다가, 곧 정승으로 환원되었다.
1356년 반원정책의 일환으로 문종 관제가 복원되면서 중서문하성의 문하시중으로 부활되었는데, 이 때 그 아래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따로 두어졌다. 1362년에 중서문하성이 다시 도첨의부로 개편되면서 도첨의정승으로 고쳐지고, 좌우 각 1인씩이 두어졌다가 이듬해에는 도첨의시중으로 되었다.
1369년(공민왕 18) 도첨의부가 문하부로 되면서 문하시중으로 환원되었으며, 이후 창왕 때에는 다시 수시중을 두어 이전의 좌시중은 문하시중이라 하고, 우시중은 수시중으로 고쳤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다시 문하부의 좌 · 우시중으로 고쳐지면서 품계도 정1품으로 되었다.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의정부에 병합되면서 의정부의 좌 · 우정승으로 되었다가, 1414년에 좌 · 우의정 으로 이어졌다. 한편, 영의정은 1401년 의정부에 두어졌던 영부사(領府事)가 뒤에 개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