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구려의 증직제도가 언제 어디에서 연원되었고 또, 어떻게 실시되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 모두가 빈번하게 중국과 교류하였고, 또 중국에서는 후한대(後漢代, 25∼220) 이래로 증직이 행해져왔음을 볼 때 중국에서 기원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는 418년(눌지왕 2) 왜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王弟 : 未欺欣)를 계교로 귀환시키고 순절한 삽량주간(歃良州干) 박제상(朴堤上)을 대아찬(大阿飡)에 증직한 것이 처음이며, 이후 통일신라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고구려에서도 246년(동천왕 20) 위군(魏軍)에 거짓 항복해 위장을 찔러 죽이고 순절함으로써 국난을 구한 동부인(東部人) 유유(紐由)에게 9사자(九使者)의 증직을 시작으로 고구려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와 당·송의 증직제를 계승해 국 초부터 중신(重臣)으로 죽은 경우나 전사자에게 1품 이하의 관직을 증직하였다. 그 뒤 1023년(현종 14) 이전에 명유·명승들도 증직하였고, 1029년 이전에는 후궁에게도 증직했다. 이어 1033년(덕종 2) 이전에는 선대공신을 증직하였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고려의 증직 제도를 계승해 국가에 공로를 끼치고 죽은 관인 등에게 정1품 이하의 관직을 증직했다.
1407년(태종 7)을 전후해서는 명유·절신·효행자를 비롯해 과거 급제 후에 관직을 받지 못하고 죽은 자 등에게도 증직함으로써, 보다 확대되고 체계화된 증직 제도로 재정비되었다. 이것이 토대가 되어 ≪속대전≫의 편찬과 함께 명문화되면서 큰 변동 없이 조선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증직 대상자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신의 경우 1등은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2등은 순충적덕보조공신, 3등은 순충보조공신의 호가 내려졌고, 명유·절신·효행자 등은 알 수 없다.
명을 받아 외국에 나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경우는 품계를 올려주었고,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못하고 죽은 경우는 종6품 이하의 관직을 증직하였다. 또한,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죽은 경우에도 그 직에 상당한 관직을 증직하였다.
한편, 증직의 사령장은 교지(敎旨)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사령장을 받은 자가 이것을 베껴 써서 증직자의 묘 앞에 두고 제사를 지낸 뒤 묘소(墓所)에 나가 불사르는 분황(焚黃) 의식을 행하였다.
오늘날에도 비록 명칭이 다르기는 하나 독립유공자, 전사한 군인과 경찰, 각종 순직공무원 등에게 계급을 올려주거나 훈장·상장을 수여하는 추서(追敍)도 조선시대의 증직 제도와 의미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