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대수(大受), 호는 노봉(老峯). 민여준(閔汝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주부윤 민기(閔機)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판서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49년(인조 27)에 정시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으로 벼슬에 나가, 예조좌랑 ·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다. 직언(直言)으로 뛰어나 사간원정언 · 사간에 제수되고, 홍문관수찬 · 교리 · 응교, 사헌부집의 등을 지냈다. 외직으로는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전라도 · 충청도 · 경상도에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1659년 현종이 즉위하자 소(疏)를 올려 인조 때 역적으로 논죄되어 죽음을 당한 강빈(姜嬪)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왕도 그 충성을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이어 병조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가 죽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상복을 벗은 뒤 사간원대사간으로 나아갔다.
그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 성균관대사성 · 이조참의 · 이조참판 · 함경도관찰사 · 홍문관부제학 ·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1670년(현종 11) 이조 · 호조 · 공조의 판서, 한성부윤(漢城府尹) ·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였다.
삼사에 재직할 때는 청의(淸議)를 힘써 잡았고, 대사성에 있을 때는 성균관의 증수(增修)와 강과(講課)에 마음을 다해 선비 양성의 효과가 매우 많았다. 또한, 함경도관찰사로 나갔을 때는 그곳의 유풍(儒風)을 크게 일으켰다.
1675년(숙종 1)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허적(許積) · 윤휴(尹鑴) 등 남인이 집권하자 서인으로 배척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1679년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 이듬해 경신환국으로 송시열 등과 함께 귀양에서 풀려 우의정이 되고, 다시 좌의정에 올라 4년을 지냈다. 이때 호포(戶布) 등 여러가지 일을 실행하려 했으나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반대에 부딪혔다.
1685년부터는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 · 판사(判事)로 물러앉아 국왕을 보필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집권하자 노론의 중진들과 함께 관직을 삭탈당하고 벽동(碧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실각하자 관작이 회복되어, 양주로 옮겨 장례를 치르고, 뒤에 여주로 옮겨졌다.
현종의 묘정(廟庭)과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 장흥의 연곡서원(淵谷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벽동의 구봉서원(九峯書院), 정평의 망덕서원(望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노봉집(老峯集)』 · 『노봉연중설화(老峯筵中說話)』 · 『임진유문(壬辰遺聞)』 등이 전하며, 글씨로는 「우상이완비(右相李浣碑)」 · 「개성부유수민심언표(開城副留守閔審言表)」 · 「개심사대웅전편액(開心寺大雄殿扁額)」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