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때 개화파와 일본은 왕조시대에 국가와 일체로 생각되던 왕실을 국정 업무와 분리함으로써 왕권을 제한하고 왕실의 정무 관여를 배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군국기무처에서 정부 조직을 근대적으로 개편할 때 국정 운영에 관한 관서는 의정부 소속으로, 왕실 업무에 관한 관서는 궁내부 소속으로 구분하였다.
1894년 7월 22일에 제정된 궁내부 관제는 1895년에 내각제를 도입한 뒤 4월 2일에 관제를 개정하면서 더욱 축소되었다. 이에 왕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같은 해 5월 1일에 특진관 제도를 신설하였다.
최초로 임명된 궁내부 특진관은 심순택(沈舜澤), 김병시(金炳始), 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 이헌직(李憲稙), 이재완(李載完), 민영규(閔泳奎), 윤용구(尹用求), 윤용선(尹容善), 이헌영(李𨯶永), 이용직(李容稙), 조동면(趙東冕), 조병필(趙秉弼), 이근명(李根命), 이건창(李建昌), 한기동(韓耆東) 등 왕실과 가까운 원로대신이나 종친 혹은 민씨 척족으로서 모두 칙임관(勅任官)으로 임명하였다.
특진관은 왕실의 전례나 의식에 관한 일을 자문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때 이건창, 한기동, 이용직 등은 출사하지 않았다. 최초의 특진관 정원은 16인 이하였고 봉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해 11월 10일, 궁내부 관제 개정으로 정원 15인 이내로 줄어든 대신 특진관의 등급을 4등급으로 나누어 약간의 연봉도 지급하였다.
갑오개혁기에 왕권을 제한하기 위해 설치된 궁내부가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에는 오히려 강화된 황제권을 실현하는 기구로 변모하면서 궁내부는 날로 확대되었다. 궁내부 특진관 수도 대폭 확대되었는데, 주로 원로대신이나 종친, 척족들을 예우하는 정치적 차원에서 임명한 경우가 많았고, 모두 실제 업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다. 1904년 이후 일제가 고문정치를 시작하고 황제권을 축소시키면서 궁내부는 대폭 축소되었고, 특진관 임명 인원도 다시 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