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성필(聖必), 호는 간산(幹山). 조구영(趙龜永)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수릉참봉(綏陵參奉)으로 황감제문과(黃柑製文科)의 병과에 급제, 성균관전적·지평·정언 등을 거쳐 다음해에 청송부사가 되었다.
1874년 병조정랑이 되고 3월에는 황해도 암행어사의 임무도 맡았다. 1876년 동부승지로서 강화도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왕의 근신으로 국정을 보필하였으며 이듬해 병조참의가 되었다. 1883년 김옥균(金玉均)·변원규(卞元圭) 등과 함께 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임오군란의 사후처리에 진력하였다.
이해 대사성을 잠시 겸하였으나 5월 동래부민란이 발생하자 동래부사에 임명되어 난의 진정에 힘썼다. 그뒤 이조참의·대사간·좌승지·홍문관부제학 등을 거쳐 1892년까지 병조·이조·형조·공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895년 8월 궁내부특진관으로 진주관찰사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단발령의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봉기하자 도주하였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비서원승(祕書院丞)·장례원경(掌禮院卿)·궁내부특진관·태의원경(太醫院卿)·중추원의관·시종원경(侍從院卿)을 거쳐 1902년에는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가 되었다.
1904년에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고, 1905년 예식원장례경(禮式院掌禮卿)·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학부대신서리(學部大臣署理)로 임명되었다가 1907년 판돈녕사사(判敦寧司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