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서울 출신. 민장호(閔璋鎬)의 아들이다.
188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92년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를 거쳐 판서까지 지냈다.
1899년 전 비서원승(祕書院丞) 송정섭(宋廷燮), 궁내부수륜과장(宮內府輸輪課長) 강견희(姜見熙) 등과 공모, 정부로부터 월미도개척권을 인가받아 그 이권을 일본인 요시카와[吉川佐太郎]에게 일화 3만 9000원을 받고 팔았다가 발각되어, 송정섭이 구속되었다.
이에 민영주의 아들인 내부협판 민경식(閔景植)이 아버지에게도 화가 미칠 것을 알고 평리원재판장(平理院裁判長) 김영준(金永準)에게 사건의 해결방안을 상의하였다. 이때 왕을 러시아공사관에 옮기게 하고 민영환(閔泳煥)·민병석(閔丙奭)·심상훈(沈相薰) 등을 죽임으로써 정권을 잡게 되면 사건이 자연적으로 무마되리라는 김영준의 제의에 동의, 군부협판 주석면(朱錫冕)·김필규(金弼奎) 등과 함께 이의 실천을 모의하였다.
모의 진행중 김영준이 민경식과의 이해관계로 월미도사건의 전모를 고발함으로써 민영주가 투옥되었다. 또한, 민경식도 김영준과의 음모사실을 고발하여 김영준은 사형되고 민경식·주석면 등은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