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11월 유학을 다녀 온 장도·신해영 등 60여 명이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단체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고, 보성전문학교에서 창립 총회를 개최하였다. 설립 취지는 “인류 생활의 자유 쾌락을 함께누리고 사회풍조의 휴척(休戚)과 안위(安危)에 상부하여 사해(四海)의 동포를 일관동인(一觀同仁)하며 동기상구(同氣相求)하고 동성상응(同聲相應)하여 세세생생(世世生生)할 것”으로 되어 있다. 창립 당시 임원은 총무원에 홍재기(洪在箕)·나수연(羅壽淵), 평의원에 장도(張燾)·유성준(兪星濬)·석진형(石鎭衡)·이면우(李冕宇)·김상연(金相演)·이갑(李甲)·노백린(盧伯麟)·유승겸(兪承謙)·유동작(柳東作)·여병현(呂炳鉉), 회계검사원 신해영(申海永) 등이었다.
단체가 결성된 것은 1904년 이후 사회·정치단체의 조직과 활동이 다양화되고 적극화되어 가는 것에 크게 영향받았다. 그런데 취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항일의식이 투철하지는 못하였다.
오직 대중을 계몽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연설회를 몇 차례 개최하였을 뿐이었다. 그 뒤 임원을 개편하여 부장 어용선(魚瑢善), 총무 석진형, 서기 이민설(李敏卨)이 선임되었으며, 회원은 200여 명이었다.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뒤 조직된 친일단체인 대한협회가 조직되어 애국 계몽 단체에 대한 회유 및 통폐합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흡수되었다. 1907년 4월 기관지로 『대한구락』을 창간하였는데 편집인은 이두연(李斗淵), 발행인은 이민설이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2호를 내고 종간되었다. →대한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