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에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궁내부(宮內府)를 중심으로 추진한 근대화 개혁이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개화파 정권이 추진한 갑오개혁과 비교하여 광무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을 이념으로 하는 자주적인 개혁이라는 평가와 그 성과를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 ‘광무개혁 논쟁’이 있었다.
먼저 개혁의 추진 이념인 ‘구본신참’은 갑오개혁의 급진적 측면으로 생긴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신구절충’을 표방한 데서 유래한다. 1897년 3월에 교전소(校典所)를 설치하고, 1899년 6월에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를 설치한 것은 모두 갑오개혁 이후의 신제도와 구제도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구 제도를 절충한 법규 제정을 목표로 하였다.
갑오개혁 때 도입된 근대적 제도는 대체로 광무개혁에서도 계승되었지만, 정치체제의 측면에서는 황제의 절대군주권을 강화한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참정권 확대를 주장하였던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를 해산한 후, 1899년 8월 17일에 선포한 「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근대 주권 국가로서 자주독립을 선언한 것이며, 동시에 입법 · 행정 · 외교 · 군대 통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황제의 절대군주권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광무개혁의 추진 주체는 황제와 그 측근의 근왕 세력이었으며, 독립협회와 대립하였던 보수적인 정부 대신들은 정권의 핵심이 아니었다. 황제와 궁내부를 중심으로 한 친위 세력들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적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재정 부족, 개혁 추진 방식의 문제,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 등으로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러일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광무개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은 광무양전 · 지계 사업이다. 1898년 7월 양지아문(量地衙門)을 설치하고 1899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실시한 양전사업(量田事業)은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218군(郡)에 대한 토지 측량을 완료하였다. 조세 부과 대상인 토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미국인 측량기사까지 고용하여 근대적인 토지측량 방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또 1901년에는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치하고 토지 소유자의 소유권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확인해 주는 지계를 발급해 주었다. 외국인의 토지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토지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근대적인 조세행정을 시작으로,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재정 자금을 확보하고, 근대적 소유권을 확립하여 자본주의 경제 제도 수립의 기본 전제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근대화 사업의 성과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분야는 수도 한성의 근대적 도시 개조 사업이다. 새 황궁인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망을 개설하고 전기 · 전차 · 전신 · 전화 · 철도 부설 사업을 추진하였다. 1899년부터 동대문에 발전소를 건설하여 서대문 · 청량리 간 전차 노선을 개통하고 전등도 보급하였다. 1899년 궁내부 산하 통신사에 전화과와 철도과를 설치하여 사업을 주관하고, 1900년에는 궁내부에 다시 철도원과 서북철도국을 설립하여 직접 경의 철도 부설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 설립된 통신원에서는 우체와 전신, 선박 및 선원 관련 업무를 주관하였고, 1902년에는 「전화세칙(電話細則)」도 반포하였다. 근대적인 기술 인력 양성을 위하여 실업학교를 설립하는 일도 활발하였다. 각종 외국어학교, 의학교, 상공학교(商工學校), 광무학교(鑛務學校) 등의 졸업생과 외국 유학생을 관직에 채용하였고, 우무학당(郵務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에서 우체와 전신 사업 인력을 배출하였다. 외국인 기술고문들이 다수 초빙되어 근대적인 기술 교육과 사업 경영에 관여하였다.
상공업 진흥 정책에 따라 각종 회사의 설립도 활발하였다. 황실이 직접 투자하여 관영 회사를 설립하거나 고위 관료 출신들이 회사나 은행을 설립하는 일이 많았다. 수공업자들이 기계를 도입하여 근대적인 생산 방식을 채택한 철가공업, 요업, 유기 제조업, 제지업, 면방직업, 견직업 분야가 있고, 그 밖에 정미업, 양조업, 담배 제조업, 성냥 제조업 등 소비재 생산 공장들도 생겨났다.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대한철도주식회사, 인한윤선주식회사 등은 주로 고위 관료들이 투자한 경우이다. 대규모 자본을 가진 특권 상인들은 궁내부 내장원에 납세하는 대신 특정 영업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고 소상공인들을 지배하는 일이 많았다. 내장원과 특권 상인들에 의해 전국 각지의 소상품 생산자나 소상인에 대해 영업세, 유통세 성격의 잡세 수취가 강화되면서 민간의 불만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 건설을 위해서는 중앙은행 설립과 근대적인 화폐제도 실시가 시급하였다. 갑오개혁 때 「 신식화폐발행장정」을 채택하고도 본위화를 주조하지 못한 채 악화인 백동화만 남발하고 있던 상황에서 황제의 핵심 측근인 전환국장 이용익(李容翊)이 화폐금융 개혁을 추진하였다.
1901년 2월에 「화폐조례」를 반포하고, 1903년 3월에 「중앙은행조례」 및 「태환금권조례」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본위화 주조와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구하지 못하여 제도만 마련하고 실행은 미룬 채 러일전쟁을 맞이하였다.
근대적인 군비 증강의 측면에서는 매년 국가 전체 예산의 40% 정도를 군사비에 배정하며 신식무기 구입, 친위대와 시위대 등 중앙군 증설, 지방군인 진위대 증설 등을 추진하였다. 1898년에 설립된 무관학교에서 장교를 육성하고 일본 육사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1899년에 원수부 설치로 황제의 군 통수권을 강화하였다.
1903년에는 상비군 양성을 목표로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모집하는 「징병조례」를 반포하였다. 그러나 결국 실시하지 못한 채 러일전쟁을 맞았고, 전시 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 진주한 일본의 군사적 강점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광무개혁은 고종 황제와 이용익 등 소수의 근왕 세력 중심으로 추진되어 그 지지 기반이 협소하였다. 대한제국 광무정권의 핵심을 차지한 근왕 세력들은 양반 출신이 아닌 중인층 혹은 그 이하의 신분 출신이지만 근대적인 실무능력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발탁된 인물이 많았다. 고종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개화 세력이나 양반 출신 정부 대신, 보수적인 유생층보다 이들을 신뢰하였다.
각종 근대화 사업도 의정부가 아닌 궁내부를 중심으로 추진하였다. 갑오개혁 때 왕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왕실업무 전담 기관으로 설치된 궁내부가 대한제국기에는 오히려 국정 운영의 핵심기구로 부상하였다. 궁내부 내장원은 황실의 사유재산 관리에 머물지 않고 막대한 규모의 재원을 관리하면서 근대화 사업에 관여하였다.
역둔토 지주 경영, 홍삼전매사업, 전국의 광산 개발과 경영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영업 · 유통 현장에서 잡세 수취를 강화하였다. 철도와 광산에 외국인 합동을 금지한다는 규칙을 제정한 후 전국의 주요 광산을 궁내부에 이속시키고 자력으로 철도 부설도 추진하였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분으로 황제권을 배경으로 한 궁내부가 전면에 나섰지만, 황실 재정의 운영이 불투명하고 비효율적인 요소가 많아 보수적인 원로대신과 개화 세력 양측으로부터 비판에 직면했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부족 문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러일전쟁을 맞이함으로써 개혁은 중단되었다.
일제는 1904년부터 고문정치를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고, 궁내부를 대폭 축소하여 근대화 관련 기구들을 폐지하였다. 국권 침탈 과정에서 황제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재정 개혁 혹은 황실 재정 정리라는 이름으로 모든 개혁 사업을 중단시켰다. 이로써 광무개혁은 실질적 성과를 맺지 못한 실패한 개혁이 되었으며, 대신 일제에 의한 식민지적 근대화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