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무양전사업은 1899년부터 1903년까지 대한제국 정부가 실시한 근대적 토지조사사업이다. 광무양전은 고종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업이었다. 1898년 의정부는 양전 사업을 두고 논쟁하였으나 회의 참석 인원 10명 중 6명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런데 고종이 이례적으로 ‘청의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비답을 내림으로써 양전 시행이 전격 결정되었다. 비답에 이어 고종은 7월 2일에 양전 담당 아문과 그 처무규정을 마련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에 따라 1898년 7월 6일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1899∼1903년까지 대한제국이 실시한 양전을 당시의 연호를 따서 광무양전이라 부른다. 광무양전은 고종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업이었다. 1898년 6월 23일 내부대신 박정양(朴定陽)과 농상공부대신 이도재(李道宰)는 전국 토지를 조사, 측량할 것을 건의하는 청원서를 의정부에 제출하였다. 이를 두고 논쟁하였으나 회의 참석 인원 10명 중 6명의 반대로 안건은 부결되었다.
그런데 고종이 이례적으로 ‘청원대로 시행할 것’이라는 비답을 내림으로써 양전 시행이 전격 결정되었다. 비답에 이어 고종은 7월 2일에 양전 담당 아문과 그 처무 규정을 마련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이에 따라 1898년 7월 6일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정식 출범하였다.
양지아문 출범에 이어 주요 보직에 대한 인사가 이루어졌다. 총재관에 박정양, 심상훈(沈相薰), 이도재, 부총재관에 이채연(李采淵), 고영희(高永喜)가 임명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사람들이었다. 박정양은 1866년 문과에, 이도재는 1882년 문과에, 이채연은 1894년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들은 1901년에 지계아문(地契衙門)을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지계아문 부총재에 김중환(金重煥)이 임명되었는데, 김중환 또한 1888년 문과 합격자였다. 이와 같이 광무양전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은 서양 사회와 서양 문물을 깊이 공부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처럼 광무양전은 관련 사항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가 결정되었다.
양지아문이 설립될 때에는 양전과 관련된 규정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양지아문은 설립된 지 반년이 지난 1899년 4월에야 양전과 관련된 9개 항의 응행(應行) 조례(條例)를 각 도에 훈령하였다. 이후 양지아문은 수세에 활용할 양안을 작성하였다.
애초에 대한제국은 이 양안을 토대로 전토(田土) 계권(契券), 즉 관계(官契)를 발급하려 하였다. 지계아문은 설립 당시 현장을 조사하여 양안을 작성하는 업무는 담당하지 않고 오직 전토 계권 관련 사무만 처리하는 임시 관청이었다. 그러다가 1902년 3월 17일 양지아문을 흡수하면서 토지 조사부터 관계 발급에 이르는 전 과정을 주관하는 상설기관이 되었다.
광무양전은 실지 조사에서 양안 작성에 이르는 전 과정을 중앙에서 관장하도록 기획되었다. 중앙에서 파견된 양지아문과 지계아문 소속 양전 실무자들은 현지 사정에 밝은 촌로[지심인(指審人)]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실제 들에서 측량하고 관련 사항을 기록하는 야초(野草)를 작성하였다. 실무자들이 작성한 야초를 토대로 군현(郡縣)에서 중초본(中草本)을 작성하였고, 중초본을 근거로 서울에서 정서본(正書本) 양안을 작성하였다.
광무양전에서는 현지 사정을 훤히 알고 있던 서원(書員)과 같은 지방행정 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아 많은 비용이 들었다. 그래서 재정 여유가 없었던 군현에서는 양전 초기부터 비용 마련에 애를 먹기도 하였다.
광무양전 때 파악한 결부수가 그 이전 시기에 비해 큰 변화가 없었던 곳에서는 벡성의 저항이 그다지 없었다. 그러나 여타 지역과 달리 이전보다 결부수가 크게 증가한 수원과 용인에서는 반발이 거셌다. 이에 대한제국은 백성들을 달래기 위하여 양전을 다시 실시하고 부세의 양을 줄여주었다.
지계아문 소속 양전 실무자들은 결부수를 광무양전 이전과 비슷하게 맞추기 위하여 양지아문에서 조사한 면적을 축소하기도 하고 등급을 낮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광무양전 이전에 작성된 양안을 참작하여 양지아문 양전 때 결정한 지목(地目)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광무양전의 목적이 비척도, 면적, 지목 등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려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광무양전의 1차 목적은 은결과 누결을 파악하는 데 있었던 것이다.
광무양전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무양전은 애초의 계획과 달리 미완의 사업으로 끝났다. 대한제국은 1899∼1903년까지 전국 331군 가운데 218군의 양전을 실시하였고, 몇몇 군에서 관계를 발급하였다. 이같이 광무양전은 군현을 기준으로 볼 때 약 2/3정도에서 그친 미완의 사업이었다. 대한제국이 광무양전을 중단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광무양안은 그 이전 양안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사실을 담고 있다. 광무양안에 새로 도입된 부분은 논밭의 모양을 그림으로 묘사한 부분과 절대 면적으로 두락(斗落)을 기재한 것이다. 굳이 더 추가하자면 양전 때 발급하였다는 의미에서 관계도 넣을 수 있다. 광무양안에 새로 추가된 이 세 가지는 서양에서 배워온 것이 아니라 중국 제도를 참고한 것이다.
조선 후기부터 다수의 경세가들은 부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의 양안에도 중국의 어린도(魚鱗圖)처럼 논밭의 모양을 그려 넣고 절대 면적을 기재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계 또한 중국의 계미(契尾)와 흡사하다. 광무양전 때 굳이 중국 제도를 본뜬 이유는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양안은 황제국 중국의 어린도와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황제국에 걸맞은 양안을 광무양전 때 제작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광무양안은 과거 양안과 같은 계통의 자료이지만 이전에 비해 한층 정교해졌다고 할 수 있다.
광무양안의 성격이 조선 고유의 양안과 같다는 것은 대한제국의 전세 정책이 조선시대 전통을 계승하였음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는 같은 땅이라도 소유자의 신분에 따라 전세량이 서로 달랐다. 소유자가 양반이면 세금을 적게 내고 상민이면 많이 납부하였던 것이다. 광무양전 때 책정된 부세량 또한 상민들의 땅이 많은 곳보다 양반들의 땅이 많은 곳에서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같이 광무양안에 조선의 신분제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한편 비옥도와 면적이 동일한 전답이라도 지역에 따라 부세량이 서로 달랐다. 여러 조건이 동일한 토지의 전세가 충청도보다 경기도와 경상도에서 상대적으로 적었는데, 경기도는 요역이 번다한 현실을 고려하고, 경상도는 전세 운송 비용이 많이 드는 사정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이같이 광무양안에는 현물[租]납의 모습도 남아 있었다.
대한제국은 광무양전의 모든 과정을 중앙에서 주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안 한 질(帙)을 탁지부에 두어 황제가 가까이 할 수 있게 하였다. 이같이 중앙정부가 토지를 직접 장악하게 되면서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광무양전을 통해 적지 않은 은루결(隱漏結)을 찾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중앙에서 토지를 직접 장악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국가의 토지 장악력이 약해진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양전을 자주 실시하지 않는 한 수시로 변화하는 농촌 현실을 중앙에 보관된 양안에 반영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농촌 변화상을 수시로 장부에 반영할 수 있도록 지방에서 양안을 관리하고, 중앙정부는 지방에서 작성한 양안을 통해 면적과 세금의 합계를 장악하면 국가의 토지장악력은 오히려 더 높아진다. 그러나 고종과 대한제국 관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조선시대 왕과 관료들처럼 황제가 양안을 곁에 두고 직접 살펴보아야만 균세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