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역은 그것이 적용되는 역사(役事)의 내용에 따라 전세미(田稅米)의 수송, 공물·진상물·잡물의 조달, 토목 공사, 지대(支待 : 중앙에서 파견된 고급 관원에게 지방관서에서 음식물·일용품 등을 공급하는 일), 영접(迎接) 등이 있다. 일정한 연령에 해당되는 장정에게 지워지는 군역(軍役)에 비하여 대개 호(戶)를 단위로 부과되었다.
삼국시대에도 축성(築城)이나 축제(築堤) 등에 양인(良人)을 동원한 사례를 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고려시대에는 16세에서 60세에 해당하는 남자를 ‘정(丁)’이라 하여 역의 의무를 부과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성곽·관서·제방 등의 축조나 도로의 개수 등 토목·영선에 동원되었다. 요역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른 호제(戶制)의 등급을 기준으로 하여 징발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공역(貢役)으로 결합되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호로 구성되는 인정의 수에 따른 계정법(計丁法)에 의해 필요한 인정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1428년(세종 10)경 호가 경작하는 전결수(田結數)를 기준으로 한 계전법(計田法)으로 개정되었다. 이후에는 경작토지를 중심으로 중앙 관부에 동원되는 역과 지방 관부에 동원되는 잡역으로 크게 나뉘어 체계화되었다.
동원되는 기간은 초기에는 평년 20일간, 풍년 30일간, 흉년 10일간으로 10월 이후 가을철에 동원하도록 규정되었다. 그러나 1471년(성종 2)부터 ≪경국대전≫에 규정된 바와 같이 계절에 관계없이 연간 6일간으로 되었다.
≪경국대전≫ 호전(戶典)의 요부조(徭賦條)에 의하면, “무릇 전지 8결에 일부(一夫)를 내되 1년의 요역은 6일을 넘지 못한다. 만약 길이 멀어서 6일 이상이 되면 다음 해의 역을 그만큼 감해주고 만약 한 해에 재차 역을 시킬 때에는 반드시 왕에게 아뢰고서 시행한다. 수령이 징발을 고르게 하지 않거나 역의 감독관이 일을 지체해 기한을 넘기게 하는 경우에는 법률에 따라 죄를 부과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그리고 서울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안은 모두 경역(京役)을 진다는 단서를 달아놓고 있다. 전지 1결에 1부를 내는 규정은 1471년에 이른바 ‘역민(役民)의 식(式)’으로 규정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계전법 자체는 전기한 바와 같이 1428년경에 처음 채택되었다. 당시의 규정은 50결 이상을 대호(大戶), 30결 이상을 중호(中戶), 10결 이상을 소호(小戶), 6결 이상을 잔호(殘戶), 5결 이하를 잔잔호(殘殘戶) 등 5등으로 나누어 차등있게 출정(出丁)하게 하였다.
이것이 성종 때에 와서 ‘8결출1부(八結出一夫)’제로 개정되어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인정을 단위로 하는 군역이나 토지의 결수를 단위로 한 요역이든 실제 국가에 동원되는 것은 인정이었다. 따라서 계정법에 의한 군역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사실상 계전법에 의한 요역이 서로 얽히는 현상이 빚어졌다.
따라서, 성종 이후에는 사실상 토목·영선에는 군인이 동원되었고, 모든 인정이 군역에 충당됨으로써 요역의 대상자는 사실상 노동력이 없는 노약자에 불과한 현상이 나타나 오히려 군역의 요역화가 촉진되었다.
신역(身役)으로서의 군역과 호역(戶役)으로서의 요역은 각각 궤를 달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보법(保法)의 성립에 의한 군액(軍額)의 확충은 요역부담 능력을 말살시켜 법제상으로 보장된 요역 체제는 성종 이후에 서서히 무너질 수 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군역에 있어서의 대립(代立) 허용 및 방군수포(放軍收布) 등의 조처를 취하였으나 오히려 국방 체제의 허약을 초래했을 뿐, 군역·요역체제는 확립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모순은 후기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군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