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치중(致中), 호는 죽천(竹泉). 박제근(朴齊近)의 아들이다.
1866년(고종 3)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879년 형조참판을 지냈고,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해 이용사(理用司)당상경리사(堂上經理事)가 되었다. 1882년 성균관대사성 · 이조참판 · 좌승지 등을 거쳐 1883년 이후 한성부(漢城府)좌윤(左尹) · 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 · 내무협판 · 협판군국사무(協辦軍國事務) · 사헌부대사헌 ·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 · 도승지 등을 지냈다.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를 거쳐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압력으로 출발을 연기하였다가 그 해 말에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 대통령 클리블랜드(Cleveland, S. G.)에게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계속된 청나라의 압력으로 1889년에 귀국해 홍문관부제학이 되었고, 1892년 전환국(典圜局)관리, 1894년 호조판서 · 교정청당상 · 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갑오개혁으로 군국기무처가 신설되자 회의원이 되었다.
이 해 11월 제2차 김홍집내각(第二次金弘集內閣)의 학무대신이 되고, 1895년 김홍집내각이 붕괴되자 내각 총리대신이 되어 을미개혁을 추진하였다. 왕궁호위병 교체문제로 사표를 제출하였으나 일본의 협조로 유임되었다. 같은 해 7월 내각총리대신을 사임하고 제3차 김홍집내각의 내부대신이 되었다. 1896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총리대신서리와 궁내부대신서리를 겸임하였다. 이 해 9월 내각이 의정부로 개편되자 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었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석해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11월 황국협회(皇國協會)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되자 다시 내부대신이 되었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이상재(李商在) 등 개화파 인사들을 지원하였다.
편저로는 『죽천고(竹泉稿)』 · 『해상일기초(海上日記草)』 · 『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 · 『일본내무성시찰기(日本內務省視察記)』 · 『일본농상무성시찰기(日本農商務省視察記)』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