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협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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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
1898년 독립협회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어용단체.
단체
설립 시기
1898년 6월
해체 시기
1898년 12월
설립자
이기동|고영근|홍종우|길영수 외
설립지
서울
후신
상무회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황국협회(皇國協會)는 1898년 독립협회(獨立協會)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어용단체이다. 1898년 6월 보부상들이 부국강병(富國强兵), 문명개화(文明開化), 충군애국(忠君愛國)을 기치로 농상공 실업을 진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보수파 대신들에게 동원되어 독립협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공격하여 해산시키려 하였다. 1898년 12월 독립협회와 함께 황국협회도 해산되었으나, 1899년 3월 상무회사(商務會社)가 설립되어 보부상들의 활동을 이어갔다.

정의
1898년 독립협회 활동에 대항하기 위해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어용단체.
설립 목적

19세기 초중반부터 보부상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집단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체계적인 조직체를 형성하고 규칙을 제정하여 상거래 분쟁 방지, 상호 구제(救濟), 경조사 등을 함께 하며 결속력을 다졌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참여하게 하였고, 흥선대원군 하야(下野) 이후에는 민씨척족(閔氏戚族)의 별동대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조선정부와 보부상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였을 때 군인과 백성들이 민씨척족을 공격하고 명성황후가 피신하는 상황에서 보부상들이 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기도 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민씩척족은 보부상 조직을 군대로 편입시키고자 하였고, 1883년(고종 20) 4월 삼군부(三軍府)에서 보부상 조직을 관리하며 준군사 조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하지만 보부상 조직의 일차적 목적은 상업활동을 안정적으로 펼치며 상업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개항 이후 외국상인들에 의해 상권을 위협받게 되자, 정부의 보호 아래 상업활동을 보장받고자 상국(商局) 설립을 요청하였고, 그 결과 혜상공국(惠商公局)이 설립되었다.

정부의 비호를 받은 보부상들은 백성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등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켰다. 그러자 정부는 1885년(고종 22) 8월 혜상공국을 내무부(內務府) 소속으로 옮기고, 상리국(商理局)으로 개칭하여 관리하고자 하였으나 보부상들의 작폐는 그치지 않았다.

보부상이 가지고 있던 특권 중 특히 상업세를 징수할 수 있는 권리로 인해 소상민, 농민들이 피해를 당하는 일이 잦았다. 그리하여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농민군의 개혁안에는 보부상 조직을 혁파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후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상리국이 해체되었고, 보부상의 상업세 징수권도 금지되었다. 이로 인해 보부상의 활동은 한동안 위축되었으나,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여 왕권을 강화해 가면서 보부상의 활동도 다시 전개되었다.

1898년(고종 35) 6월 30일 보부상들은 황국협회를 결성하였다. 황국협회는 이기동(李基東), 고영근(高永根), 홍종우(洪鍾宇), 길영수(吉永洙) 등 황제 측근 세력이 주도하고, 여러 고관들이 지원하였다. 황국협회는 “나라를 문명 부강케 하는 도리로 황실을 존숭하고 충군하는 대의를 밝힌다.”는 입장과 ‘농상공 실업을 주의로 할 것’을 설립 취지로 내세웠다.

주요 활동

1896년(고종 33) 조직되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개혁운동을 펼쳤던 독립협회는 1898년(고종 35) 10월에 이르러 보수파 대신들을 비판하고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기 위한 상소를 연달아 올리며 강하게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고, ‘ 헌의6조’를 의결하여 열강에 이권 양여 금지, 재정의 일원화 및 정부 예산 공개, 중죄인의 공개재판, 중추원 개편 등을 요구하였고, 고종 황제는 이를 수용하였다.

그러나 수구파 대신들은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共和政)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였고, 이에 놀란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 간부 총 17명을 체포하고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독립협회 회원들과 서울시민들은 함께 '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체포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정부는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자 하였으나, 더 많은 시민들이 모여 보수파 대신들에 대한 탄핵, 독립협회 복설, 헌의6조의 실행을 요구하며 시위를 지속하였다. 이에 고종은 독립협회를 무고한 보수파 관료 처벌, 독립협회 복설, 헌의6조의 실행 등을 약속하며 민심을 달래려고 하였으나, 만민공동회는 즉각적인 실행을 요구하며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보수파 관료들은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를 공격하였다. 보부상들이 만민공동회를 공격하였다는 소식에 더 많은 시민들이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11월 23일 고종 황제는 다시 한 번 정부 대신 처벌, 황국협회 지도부 처벌, 보부상 혁파 등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약속과 달리 보부상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보수파 관료들은 이들을 이용하여 독립협회 세력과 만민공동회를 계속 공격하였다.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뜻으로 중추원 의관(議官) 50명을 새로 선임하였는데, 독립협회 계열 인사가 17명, 황국협회 인사를 포함한 황제 측근 세력이 33명이었다. 정부가 중추원 구성과 개혁을 약속한 대로 이행하지 않자 독립협회는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고 개혁을 촉구하였다.

결국 1898년(고종 35) 12월 정부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시켰다. 황국협회도 독립협회와 함께 해산되었으나, 길영수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정부에서 요직을 차지하였다. 1899년(고종 36) 3월에는 상무회사가 설립되어 보부상들은 정부의 후원 속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참고문헌

원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단행본

김종준, 『한국 근대 민권운동과 지역민』(유니스토리, 2015)
조재곤, 『근대 격변기의 상인 보부상』(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논문

도면회, 「(한국 근대국민국가 형성과 왕권) 황제권 중심 국민국가체제의 수립과 좌절」(『역사와 현실』, 50, 한국역사연구회, 2003)
조재곤, 「대한제국기 특권상업체제의 폐설과정」(『국사관논총』 93, 국사편찬위원회, 2000)
이상찬, 「대한제국시기 보부상의 정치적 진출」(『한국문화』 2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99)
주진오, 「19세기 후반 開化 改革論의 構造와 展開: 獨立協會를 中心으로」(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5)

신문 · 잡지 기사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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