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당 ()

근대사
단체
근대 개화기 독립과 개화를 기치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정치 집단.
이칭
이칭
독립당(獨立黨), 개진당(開進黨), 개론당(開論黨), 진보당(進步黨), 신론당(新論黨), 개화파(開化派)
단체
설립 시기
1879년
설립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
내용 요약

개화당은 근대 개화기 독립과 개화를 기치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정치 집단이다. 1870년대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이 형성한 초기 개화사상, 중국을 통해 수용한 서구 문물 등을 공부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이 현실 정치에서 개화사상을 실현하고 개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형성한 정치 세력이다. 개화당은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정의
근대 개화기 독립과 개화를 기치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하여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정치 집단.
배경

1876년 개항 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조선은 역사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전통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수립하는 동시에 외세의 국권 침탈을 막아내고 자주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한국이 외세의 도전에 대응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명맥을 유지하려면 개화(開化)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19세기 후반 조선의 문호개방과 부국강병을 추진했던 정치 세력들을 가리켜 개화파(開化派)라 부른다.

설립 목적

개화파는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거치면서 크게 두 파로 갈라졌다. 청의 조선 속방화(屬邦化) 정책에 대한 비판 등 외교 문제, 자주독립(自主獨立)의 강조 여부,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범위와 속도 및 개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권력 장악 방법 등을 둘러싸고 의견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통적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으로 개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온건론을 주장했던 사람들로, 김윤식(金允植), 김홍집(金弘集), 어윤중(魚允中) 등이 여기에 속해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국가의 모든 체제를 전면적으로 철저히 개혁해야 한다는 급진론을 주장했던 사람들로, 대표적으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 후자는 1880년 이후 스스로 독립당(獨立黨), 개진당(開進黨), 개론당(開論黨), 진보당(進步黨), 신론당(新論黨)이라고도 하였으나 보통은 ‘개화당(開化黨)’이라 불렀다.

당시 개화당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던 일본은 ‘개화당’으로, 미국은 ‘The Progressive Party’라고 불렀다. 한편, 개화당은 전자를 수구당(守舊黨), 사대당(事大黨), 보수당(保守黨), 척론당(斥論黨), 구론당(舊論黨)이라고 부르며 자기들 당과 엄격히 구분하였다. 이 두 집단을 통틀어 개화파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급진’과 ‘온건’이라는 개념은 각각이 추구한 사상의 내용을 고려하기보다는 개혁 방식이나 추진 속도 차이를 기준으로 삼은 분류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지적되었다. 따라서 개화파의 구분 문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대안적 용어가 제기되었다. ‘혁신파’와 ‘온건파’, ‘개량적 개화파’와 ‘변법적 개화파’, ‘양무개화파’와 ‘변법개화파’, ‘시무개화파’와 ‘변법개화파’ 등이 그것이다.

변천 및 현황

개화당은 박규수(朴珪壽)의 영향하에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서계여(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청에서 나온 신서(新書)를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을 얻고 개화 사상을 익혀 갔다.

박규수가 사망한 후로는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 혹은 유대치(劉大致)와의 빈번한 접촉을 통해 불교를 접하게 됨으로써 종래 유교를 절대적 사상으로 신봉했던 양반들과는 달리, 유교적‧양반 중심 정치 체제를 부정하고 국가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생각까지 갖게 되었다.

개화당은 김옥균이 주도한 정치 집단으로서, 자기들의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 정권 획득을 목표로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왕정(王政) 체제하에서는 나라를 전복시키려는 반역(叛逆)으로 간주될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비밀단체로서 활동하면서 점차 세력을 규합해 갔다.

개화당이 조직된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먼저 1879년에 개화당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으로 파견한 시점이 1879년이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하여 김옥균 등의 정치 세력이 결사체를 구성한 것을 대략 1879년경이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한편, 김옥균 자신이 정변을 단행하기 10년 전인 1874년경 이미 독자적 정치결사를 의미하는 ‘오당(吾黨)’의 존재와 활동을 기록하고 있으므로, 1874년에는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초기 개화당의 핵심 인물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은 갑신정변을 일으킬 때까지 동지를 규합해 갔다. 김옥균은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서 1872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개화당의 중심이었다.

박영효는 박원양(朴元陽)의 아들로 1872년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하여 철종의 부마가 되었으며, 정1품 금릉위(錦陵尉)에 봉해졌다. 서광범은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1880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가주서로 일하고 있었다.

개화당은 자기 세력을 형성, 발전하는 데 있어서 양반 출신들뿐만 아니라 중인, 무인, 승려, 상민 등도 동지로 규합해 갔다. 예컨대 유혁로(柳赫魯)는 무관 출신으로 오위장이었고, 변수(邊樹)는 중인 출신이었으며, 이동인(李東仁)탁정식(卓挺植)은 승려 출신이었다.

이인종(李寅鍾)은 판관, 이희정(李喜貞)은 군인, 이창규(李昌奎)는 보부상의 통령이었고, 윤경순(尹景純)은 동대문 밖에서 상업에 종사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개화당이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서양식 사관 교육을 보낸 14명의 사관생도 가운데에는 서재필(徐載弼)과 같이 양반 출신도 있었지만, 신복모(申福模) · 이은돌(李殷乭)과 같은 평민 출신도 있었다. 이처럼 개화당의 형성과 발전에 참여한 구성원 신분은 각계 각층으로 구성되었다.

이 외에도 개화당은 정계 거물 인사를 포섭하기 위해 이재긍(李載兢), 민영익(閔泳翊), 홍영식(洪英植)도 포섭하고자 하였다. 이재긍은 대원군의 형 이최응(李最應)의 아들이었으나 1881년 사망하였다. 왕후의 친조카였던 민영익은 왕후의 입장을 따라 대원군과는 상극 관계였는데, 미국을 다녀온 후 개화당에서 이탈하고 김옥균 등과 상반된 정치적 견해를 갖게 되었다.

한편,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보빙사(報聘使)에도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이 외에도 왕비의 총애를 받았던 내시 유재현(柳在賢, 柳載賢)이나 궁녀까지도 끌어들였다.

주요 활동

개화당 주요 인사들은 서구의 근대적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여 개혁과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데 목적을 두고, 이를 위하여 첫째로 국왕의 신임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국왕이 개화당을 신임한 결과 박영효 수신사 일행은 개화당 인물들로 구성되었고, 국왕은 1883년 차관을 얻는 데 필요한 신임장을 김옥균에게 주기도 하였다.

둘째로, 개화당은 유학생 파견, 신문 발간 계획, 도로 정비, 치안제도 개혁, 군대 양성, 우정사업 개설 등 다양한 사업을 통해 내치(內治)에 힘썼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을 방문할 때 데리고 간 수행원들을 그대로 남겨 유학하게 했고, 특히 육군도야마학교[陸軍戶山學校]에 서재필 등 14명으로 하여금 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제(軍制)를 배우도록 하였다.

박영효는 한성부판윤 재직 시 일본에서 얻은 차관금 일부를 들여 신문 간행을 추진했고, 김옥균이 쓴 「치도규칙(治道規則)」을 고종에게 바쳐 도로 정비가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시행하는 신식 경찰제도를 소개하여 한성부에 순경부(巡警部)를 설치하라는 윤허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시도들은 대체로 박영효가 한성부 판윤에서 물러나면서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후 광주유수로 임명된 박영효는 병사 육성에 착수하여 약 1천 명을 훈련시켰다. 1년 후 박영효가 훈련한 군대는 친군전영(親軍前營)과 후영(後營)에 편입되었지만, 이들 가운데 친군전영 군대들이 갑신정변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개화당은 14명의 사관생도들이 귀국하자 사관학교를 설립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사관학교 설립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한편, 홍영식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설치 후 우정사(郵程司) 협판을 맡았고 보빙사로서 미국 각지를 시찰하고 왔는데, 이후 1884년 4월 국왕의 명으로 최초의 근대식 우체기관인 우정총국(郵征總局)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후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개화당 인사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여 우정사업 또한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셋째로, 개화당 인사들은 외국 사정에 밝고 국제 정세에 민감하였다. 이들 중 민영익, 김옥균, 홍영식은 협판으로, 윤치호와 변수 등은 주사로서 당시 외교 담당기관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소속되어 근무하였다.

이들은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조선이 토지의 면적, 인구 수, 지정학상으로 유사한 이탈리아의 사례를 본받아 조선도 균세(均勢), 즉 세력 균형(勢力均衡)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다양한 국가와 외교관계를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러시아,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화당 인사들은 서적을 통해 외국의 지식을 쌓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차례의 외국 시찰을 통한 현황 파악을 중시하기도 했다. 특히 메이지유신 이후 발전상을 보였던 일본을 문명 개화의 모델로 삼아 정치제도를 개혁해 보려는 생각에서 일본을 여러 번 시찰하였다.

그 밖에도 외교사절단과 빈번히 접촉하면서 독립 국가의 체면을 유지하고, 각국의 의사를 타진하고 거사 계획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미국, 영국, 독일 외교 대표들은 개화당의 의사 타진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므로, 실제 갑신정변 준비 과정에서 개화당은 일본 측에 의존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개화당 인사들은 개항 이후 늘어난 재정 지출로 인해 심화된 국가 재정난의 타개와 정치자금 확보를 위하여 외국에서 차관을 끌어오려는 방책을 세우고 차관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다. 1882년 박영효가 수신사로서 일본에 가면서 일본 정부 주선으로 요코하마 정금은행에서 17만 원 차관을 획득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차관을 신문 간행이나 유학생 파견에 소비했으므로 정부의 재정적 수입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결국 국내 재정 궁핍을 해결하기 위해 묄렌도르프 등은 당오전(當五錢) 발행에 나섰던 반면, 김옥균은 당오전 같은 악화 주조로는 재정난을 타개할 수 없다면서 외국차관 도입을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 김옥균은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 직함을 띠고 300만 원 차관을 도입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향하였다. 수행원으로 백춘배 · 탁정식 등을 데리고 갔고 일본인 가이군지[甲斐軍治]를 고용하였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이 불가능해진 후 요코하마의 미국무역상사(American Trading Company)에서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 시부사와 에이치[澁澤榮一] 등과 교섭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의의 및 평가

개화당은 조속한 시일 내에 국가를 근대적 체제로 개혁해 보고자 다양한 방면으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 독립 유지를 위한 외교 교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열강 외교관들과 폭넓게 접촉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추진한 개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은 급진적인 측면이 많아 당시 일반 사람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이들은 결국 1884년 12월 4일(양력) 마침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개화당은 반대파 관료들을 처단하고 신정부를 수립한 데 이어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혁신 정강을 공포하고 개혁 정치를 시작하려 하였다.

그러나 정변 사흘 만에 청군이 개입하여 진압함에 따라 개화당의 갑신정변은 실패로 끝났다. 이때 홍영식 · 박영교와 사관생도 7명은 청군에게 피살되었고, 김옥균 ·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갑신일록(甲申日錄)』

단행본

한국사연구회 편, 『새로운 한국사 길잡이』 下(지식산업사, 2008)
박은숙, 『갑신정변 연구』(역사비평사, 2005)
김용구,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사대질서의 변형과 한국 외교사』(원, 2004)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연구』(일조각, 1989)
이광린, 『한국사강좌』 Ⅴ-근대편(일조각, 1981)
이광린, 『개화당연구』(일조각, 1973)

논문

한철호, 「개화파연구의 실증적 초석 쌓기와 그 의의: 이광린의 개화당연구를 중심으로」(『한국사연구』 148, 2010)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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