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혁로(赫老). 하급무인 유상오(柳相五)의 아들이다.
1855년 충청남도 홍주에서 출생하고 아산에서 성장하였다. 1876년 3월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장위영(壯衛營) 영관(領官)으로 임명되었다. 1880년 12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882년(고종 19)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오위장의 신분으로 통신연락과 정찰임무를 맡아보았다. 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박영효의 지도하에 유학생 기숙사인 친린의숙(親隣義塾)을 관리하고 박영효와 김옥균의 신변보호를 담당하였다.
1894년 관계에 복귀하여 군무아문참의(軍務衙門參議)를 지냈고, 1895년 4월 육군부령(陸軍副領)으로 진급하여 포공국장(砲工局長)으로 임명되었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일본군을 이끌고 왕궁에 침범하였으며, 사변 후 친러파가 우세하자 재차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에서는 군사 및 산업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5월 서북영림창(西北營林廠)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그해 12월 평안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908년 신·구 학문 연구를 표방하고 설립된 친일 유교학회인 ‘대동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조약 체결로 국권이 넘어간 뒤 경기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중 1914년부터 1916년까지 경기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3월 충청북도 지사로 승진하고 충청북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담당하였다.
1917년 6월 충북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퇴직 후에는 주로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부터 1939년까지 조일석검(朝日石鹼)(주) 감사, 1923년부터 1927년까지 한성신탁(漢城信託)(주) 감사, 1927년부터 1939년까지 대륙고무공업(大陸護謨工業)(주)의 이사를 역임하였다.
또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며 식민정책에 협력하였다. 1921년부터 1927년 4월까지, 1930년 6월부터 1940년 5월 사망 때까지 약 19년 10개월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및 참의를 지냈다. 1939년 11월에는 친일 유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식민통치에 협력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1920년 2월 훈4등, 1926년 11월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1년 6월 귀족의 예우를 받는 종4위에 이르렀다.
유혁로의 일제시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pp.912~92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