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 지역의 대표적인 유지이자 실업가이다.
1886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27세때 개성에서 영신사를 설립하여 위탁판매 및 금융창고업을 운영하였다. 그 후 일본으로 가서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바로 개성인삼조합의 이사로 취임하였다.
1917년 4월에는 개성전기주식회사 설립에 대주주로 참여하여 전무이사에 취임하였다. 그 뒤 대표이사로 선임되어 1936년 서선합동전기주식회사로 흡수 통합될 때까지 회사를 이끌었다. 개성전기주식회사의 발기인과 중역 중에서 제일가는 부자로 알려져 있었다.
개성 지역의 여러 사업체에도 관여하였다. 1921년부터 1935년까지 고려삼업합자회사의 대주주이자 전무이사를 역임하였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 송도도기주식회사 이사,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서선흥농 감사, 1927년 송도고무공업주식회사의 이사를 맡았다.
고려인삼업사, 개성양조주식회사 등의 설립에도 참여하였다. 1929년에는 송고실업장을 인수하여 주식회사로 조직을 개편하고 해방 후까지 경영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개성 지역 경영인 단체의 수장 역할을 두루 맡았다. 1921년 7월 조선인산업회 발기인, 1931년 조선물산장려회 이사, 1932년 개성상공회의소 회장, 1938년 조선상업은행 감사역 등을 역임하였다.
개성 지역의 교육과 문화 사업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1920년 4월부터 1년 동안 동아일보 개성지국 지국장을 지냈고, 1930년 개성부 사립학교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개성 지역의 유력 언론기관인 고려시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1941년 4월까지 이끌었다. 1942년 12월 선대로부터 전해 오던 고전 만여 권과 사재 27만원을 기증하고 재단법인 중경문고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물적 기반을 토대로 지역사회의 유지로 행세하면서 일제 지배에 협력하고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 1925년 10월 조선신궁진좌제에 개성 대표로 참여하였다.
1927년 4월부터 경기도 도평의회 민선 의원, 1931년 6월 개성부회 부의장, 1933년 관선 도회의원, 1935년 개성부회 의원 등을 지냈다. 1937년에는 비행기 제작비로 1만원을 헌납하였으며, 1938년 개성부 청사 건축비로 2천 7백원을 기부하고 포상을 받았다.
1935년 4월부터 1938년 4월까지 3년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고, 1939년 조선경방단 경기연합 지부 개성단장과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부터 1년 동안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총력연맹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44년 9월 비행기를 제조, 조달할 목적으로 설립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감사로 회사를 운영하며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였다.
이러한 행위로 인하여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50년 7월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