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백산(白山). 1910년대 독립운동에 일시 참여하였지만, 전향하여 민주에서 항일운동가 탄압에 앞장선 인물이다.
1892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출생하여 1909년 평양 대성중학교에 3년을 수료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 체결로 국권이 넘어가자 독립운동의 뜻을 품고 만주로 이주하여 황병길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 한민회 본부의 국자가 교육회 사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경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신한촌 권업신문사에서 교정계에서 근무하였고, 1915년 훈춘교우회 총무로 활동하였다. 1916년 이르쿠츠크에서 2년제 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4월 이르쿠츠크 보병 제27연대 사관이 되어 민스크 전선에 참여하였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모스크바 정치학교를 졸업했고, 국제공산당 정치반을 수료하였다. 1920년 러시아공산당 한인분과 선전과에서 활동하였고, 그후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과 조선혁명군 장교단의 수장이 되었으며, 트로츠키파에 가담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 전한공산당 창립대회 의장과 상하이 고려공산당 군사부 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6월 사회주의 운동의 내부갈등에 의해 촉발된 ‘자유시참변’에 연루되어 소련군에 체포, 4개월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22년 소련군 제2사령부의 중국어 통역관으로 종군하였고, 중국 미산현에서 백군 토벌에 참가하였다. 스탈린이 집권하자 소련공산당에서 제명되어 블라디보스토크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1924년 12월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운동 혐의로 소련 정치 보안부에 체포되어 일본영사관에 넘겨졌고, 1925년 8월경 귀국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 고위관료, 친일 인사들과 관계를 맺으며 일제에 적극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1931년 만주 지역 조선인 친일기관인 민생단의 조직 준비작업에 참여하였다. 1934년 9월에는 일본 관동군사령부 옌지헌병대의 지시에 따라 간도협조회 성립을 주도하였으며, 1936년까지 그 회장을 맡아 총지휘하였다. 간도협조회를 중심으로 일본 옌지헌병대 대장과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 중공 지하당 조직과 항일연군, 독립운동가와 단체를 탄압·체포하고 파괴하였다. 또한 간도협조회 내부에 의용자위단과 협조의용단 등의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특수공작을 벌였다. 1935년에는 관동군 헌병대사령부 북지파견공작반 반장을 겸직하였고, 만주국협화회 동변도 특별공작부 본부장을 겸직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1936년 7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공을 받고 한 달마다 헌병 하사관 군조급 대우인 120원을 수당으로 받았다. 또한 1937년 1월 만주국협화회 중앙본부에 촉탁이 되어 매달 200원을 받았으며, 항일세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여 일제에 보고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만주국협화회 싼장성 특별공작부 부장이 되어 부대원을 이끌고 항일부대를 습격·파괴하였고, 항일부대 간부와 부대원, 반일대중 등을 살상하고 체포하고 투항시켰다.
1937년 12월 동북항일연군 제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을 귀순시킬 목적으로 싼장성 이란현 반전구에 치안공작반을 거느리고 들어갔다가 역습을 당해 김정국 부대에 의해 유인·사살되었다. 김동한 사망 후 일제는 장의를 간도유지장으로 거행하고 만주국협화회 주관으로 동상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1940년 2월 10일 일본 정부는 김동한에게 항일운동가 탄압에 앞장선 공로를 치하하여 훈6등 단광욱일장을 수여하였다.
김동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2004년 공포된 대통령령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받아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IV-2: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