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근은 일제강점기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평의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육영사업가이자 실업가이다. 호는 청암이다. 1886년(고종 23)에 출생하여 1965년에 사망했다. 청주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시작한 육영사업은 청주대학교와 산하 6개 초·중등학교로 확대되었다. 공직에 진출하여 1935년, 1941년~1945년 도회의원을 지냈다. 재력을 바탕으로 비행기 ‘충북호’ 헌납자금을 지원하였다. 또한 『매일신보』에 전쟁 승리 축전과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광고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였다.
1886년 10월 10일 경상북도 경주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 한학을 수학하였다. 행상으로 전국 각지를 전전하다가 1899년 조치원에서 작은 도매상을 경영하며 부를 축적하였다. 1913년과 1914년 도로용지로 토지 140여 평과 밭 163평을 기부하여 목베를 하사받았고,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 즈음하여 총독부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1916년 조치원청년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충남중학교를 설립하려고 기성회를 구성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그 뒤 충청북도 청주로 이주하여 지역의 대표적인 유지이자 실업가로 사업을 경영하면서 교육과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3년 1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4년 청주 대성보통학교를 설립하면서 본격적으로 육영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설립비로 사재 1만 6천원을 출자하였고, 그 후에도 해마다 유지경비로 3천여 원씩 지원하였다.
1925년 4월 궁핍해지자 2백여 빈민에게 좁쌀을 나누어주는 등 이후 여러 차례 빈민구제에 참여하여 부의 사회환원에도 기여하였다. 이처럼 교육과 사회활동에 기여한 공으로 1929년 도지사 표창과 1931년 충북교육회 표창을 받았다. 1931년 충청남북도의 합병안이 제기되자 청주시민대회를 조직하여 합병 반대 시민운동을 추진하였다.
1930년대에는 광산 경영에도 뛰어들었다. 1933년 충북 음성군 원남면, 괴산군 도안면 일대 98만여 평과 1937년 괴산군 사리면 등 충북 일대에서 여러 광구를 운영하였으며, 괴산군 증평면 소재 문암금광제련장의 금제련업을 허가받아서 운영하였다. 또한 1935년 주식회사 중앙상회를 설립하는 등 대규모 무역활동을 통하여 큰 자산가가 되었다.
1935년 동생 김석정, 김영근과 협력하여 청주상업학교를 설립하였다. 1944년 3월에는 청주여자상업학교까지 신설하여 청주지역 교육사업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충북 청주를 중심으로 경제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하는 한편, 1930년대 중반경부터 공직 및 각종 단체에 참여하여 일제의 식민지배에 협력하였다. 1935년 11월 지방의회에 출마하여 청주읍회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12월 관선 도회의원이 된 후 1935년, 1941년에서 1945년까지 도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많은 재력을 바탕으로 일제의 지배정책과 침략전쟁을 지원하였다.
1936년 청주 신사 이전 및 건축비로 1천 5백원을 기부하여 일본 상훈국 총재로부터 표창을 받았고, 충청북도 청사 신축비로 1만 5천원을 기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다. 또한 1937년 비행기 ‘충북호’ 헌납자금으로 5천원을 기부하였다. 1938년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충청북도연맹 이사를 역임하였고, 조선방공협회 충북지부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부터 1942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7년부터 『매일신보』에 수차례 전쟁 승리 축전과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광고를 게재하였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평의원, 충북 유도연합회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1942년 6월부터 1945년 6월까지 3년 동안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였다. 1942년 9월에는 만주국 신경에서 개최된 ‘만주국건국10주년축전’에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초대되었다. 일제 지배정책에 적극 협력한 공을 인정받아 수차례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1935년 조선총독부시정 25주년 기념표창 및 은배 1조와 대일본무덕회 조선지방본부로부터 유공장을 받았다. 1940년 10월 조선총독부시정 30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첫 민간대학으로 청주상과대학을 설립하였고, 재단명칭을 김해학원에서 대성학원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청주대학교와 산하 6개 초 · 중등학교로 확대되었다. 교육계에서의 공로로 1962년 공익포상을, 1964년 문화훈장을 받았다. 1965년 12월 사망하여 사회장이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