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을 개편해 1911년 1월에 설립한 은행이다.
조선상업은행은 일제 강점 직후 민족계 은행의 약화와 말살을 도모하는 동시에 민족계 은행에 대한 일본인 자본·세력의 침투·지배를 강화하는 총독부의 정책의 일단으로서 성립되었다.
총독부는 이와 같은 기본정책 노선에 따라 먼저 대한천일은행의 명칭을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이미 일본의 식민지가 된 한국 내에서 ‘대한’이라는 용어는 사용할 수 없다는 강력한 정책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조선상업은행을 모체로 하여 민족계 은행 세력의 약화와 일본인 세력의 지배라는 기본정책이 장시일에 걸쳐 꾸준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원대한 계획의 실천을 위해 최초로 감행한 조처는 한말의 황실은행으로 인정된 대한천일은행에 대한 황실의 채권·채무를 정산하게 하여 황실 세력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황실 세력이 제거되고 나자, 곧바로 민간이 주동이 되는 조선상업은행이 출범하였다.
다음으로는 본격적으로 민족은행에 대한 일본인 세력의 침투, 지배력 강화정책이 추진되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서, 먼저 한국 내의 각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일본인이 설립한 군소은행을 흡수, 합병하게 하여 조선상업은행에 대한 일본인의 자본·세력의 침투·강화를 도모하였다.
예를 들면 1920년대에 금융공황과 부실경영으로 도산 지경에 이른 일본인 경영의 군소은행인 원산상업은행·조선실업은행·대동은행 등이 1923년에서 1925년에 걸쳐 조선상업은행에 흡수, 합병되었다. 이로써 이들 은행의 경영주와 주주들은 은행 도산을 구제받고도 조선상업은행의 주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본인 자본과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자 1922년 7월에는 경영자 진용 구성에 일본인의 참여를 허용였다. 이 때 비로소 전무취체역에 일본인이 기용되어 은행이 일본인 책임하에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민족계 은행 세력의 약화정책도 조선상업은행이 민족계 지방은행을 흡수, 통합하는 방법으로 목적을 성취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건실하게 운영되고 있던 삼남은행(三南銀行)이 1932년 1월에, 북선상업은행(北鮮商業銀行)이 1933년 5월에, 경일은행의 전신인 대구상공은행(大邱商工銀行)이 1941년 9월에 각각 흡수, 통합되었다.
조선상업은행의 자본 구성을 보면, 1917년에 자본금 57만 5000원이던 것이 군소은행의 흡수와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흡수, 통합되는 은행의 자본금이 가산되고 자체의 증자도 단행해 1929년 6월에는 공칭자본금 892만 5000원, 불입자본금 447만 5000원으로 증액되었다. 광복 후 한국상업은행으로 개편되었다가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으로 통합되었고, 다시 2002년에 이르러 지금의 우리은행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