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상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소비·분배 등의 과정을 통해 생활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체계적인 생각의 흐름을 말하는 경제용어이다. 경제사상은 그 시대의 통치이념에 따라 강제되기도 한다.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와 봉건적 질서 유지를 위해 이윤 추구를 극도로 억제하는 중농주의를 표방한 조선 초기의 중농주의가 그 예이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파에 의해 개혁적 토지제도론이 제기되었고 실학파 일부는 농업과 상공업의 균형 발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개화기에는 부국강병사상으로서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문명과 회사 경영을 통한 중상주의 사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한국경제사연구의 여러 문제 중에서 특히 경제사상사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많은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사상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때, 한국경제사의 시대구분 문제나 구조적인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데 경제사상사의 연구는 매우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필요 및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의 연구성과는 아직 만족할 형편이라고 할 수 없다. 앞으로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며, 여기서는 개괄적인 경제사상을 살펴보려 한다.
조선의 창건은 바로 불교적 통치이념에 대한 주자학적 통치이념의 승리였다. 고려 말기 이후 개혁파에 의해 추진되었던 주자학적 노선의 정치적 승리는 주자학의 보급을 가속화하였고, 그것은 경제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주자학의 보급과 병행하여 삼강오륜사상은 가치의 기준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삼강오륜은 가부장적 대가족제도와 봉건적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강제되었기 때문에, 이윤의 추구는 이와 같은 대의명분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이윤추구를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었고, 특히 양반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따라서 농업은 중요시되었지만 공업과 상업은 말업시(末業視)되어, 상인과 수공업자는 남을 속임으로써 이윤을 취하고 가격을 조작하여 시중의 물가를 등귀시키는 무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경제사상은 중농사상(重農思想)에 치우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李成桂)는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하였는데, 그 내용은 양전사업(量田事業)과 과전법(科田法)의 시행이었다. 이러한 개혁의 골자는 사전(私田)을 몰수하고 토지를 재분배함으로써 고려 말 귀족의 물질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의 집권체제를 확립하자는 데 있었다.
태조는 고려 말부터 시행한 전제개혁을 즉위 후에도 계속 준수할 것을 선언했으나 본질적으로 고려의 전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토지분배에 있어서 토지국유의 원칙에 입각한 토지의 공평분배와 함께 공평한 조세를 징수하기 위해 과전(科田)에도 수조권(收租權)만을 이양하였을 뿐이지 결코 토지소유형태의 본질적인 개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제개혁을 통해서도 토지의 사유화와 겸병(兼倂)의 길은 완전히 막을 수 없었다는 것도 고려왕조 토지정책과 같았다.
둘째, 조선 초기의 건국공로자들에 대한 토지의 분배는 결국 세습화의 길을 터놓았고, 따라서 초기의 과전법이나 직전법은 그대로 시행할 수가 없게 되고, 토지의 겸병은 이미 태종 때 크게 성행하였음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개인소유의 농장을 통하여 수만 석의 추수를 거두는 지주적 부호가 출현하는 형편이었다.
토지제도의 본질은 국가가 그로부터 가장 많은 조세를 징수하기 위해, 그 포탈을 방지하고 부과의 공정을 기하려는 데 있으므로, 토지의 철저한 조사로써 지등급(地等級)에 대한 공평타당한 평가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조세부과 평가기준인 토지의 단위는 결부제(結負制)로서, 결부제는 일정한 수확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한 것이지만, 토지의 비옥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어려운 만큼, 1결(結)의 면적을 정하는 데 여러 가지 정실과 불합리한 요소가 많았던 것이다.
한편, 상공업 분야도 국가이익과 민생안정을 조화시키는 방향에서 사상(私商)이나 사장(私匠)이 억제되는 대신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운영되는 관장(官匠)·관상제(官商制)가 채택되었다.
육의전(六矣廛)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통사회의 경제질서는 농본상말사상(農本商末思想)을 근간으로 하고 상공은 원칙적으로 국가통제하에 관상·관장제를 견지하고 있었다.
농업은 가장 중요한 산업이며 의식생활(衣食生活)의 근본이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은 조선 전기에 한층 체계화되었다. 역대 임금의 중농정책과 농서간행사업(農書刊行事業)에서 농본사상을 찾을 수 있다. 정도전(鄭道傳)에 의하면 농업·상업은 의식의 근본으로서 왕정에 있어서 제일 먼저 시행할 일이라고 하였다.
즉,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지키게 되고,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므로, 왕정은 의식의 근본인 농상부문에 우선적으로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건국 초기부터 한결같이 지속되었는데, 태조와 세종은 농상을 왕정의 근본이라 하여 농상장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세종의 중농사상은 지극했으며, 농민의 보호와 농업생산의 증대에 힘썼다.
1429년(세종 11)에 나온 정초(鄭招)의 ≪농사직설 農事直說≫은 세종의 중농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세종은 농업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농업행정은 그 지방의 농업에 밝은 관리를 잘 선택해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세종 자신도 농업기술의 체득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세종은 무엇보다도 적기파종(適期播種)의 유리함과 농업행정에 있어서의 지방관의 책임이 막중함을 깊이 인식하여, 관계관들에게 정성을 다해 백성들이 농업에 힘쓰게 할 것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농본사상은 유교 및 한문의 보급으로 지식인들의 표현능력이 향상되었고, 삼강오륜이 강조되어 청빈을 미덕으로 여기게 됨에 따라 농본사상을 한층 체계화하여 농·공·상의 우선순위가 뚜렷해졌다.
당시의 농본사상은 민본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농본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을 뜻하고, 민본은 ‘민유방본(民惟邦本)’의 약칭이지만, 국민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재정과 가계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으로 그러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토지개혁론을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 말에는 농본과 민본에 역행하는 토지겸병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 일반농민은 대토지소유자의 소작인이 되어 과도한 지대를 수취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따라서 농민의 생산의욕은 위축되게 마련이며 농업은 쇠퇴하지 않을 수 없었고, 농업의 쇠퇴로 말미암은 정부수입의 격감으로 재정난에 봉착하였으며, 토지겸병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그리하여 토지겸병을 방지하기 위한 공전제(公田制)나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정도전의 토지국유론과 조광조(趙光祖)의 한전론 같은 것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토지겸병은 관료와 지주들의 안전한 부(富)의 축적수단이었는데, 그들은 축적된 부의 일부를 묘지경영에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서경덕(徐敬德)은 토지겸병과 관련된 묘지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제사상은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중국 고대의 공전·균전제(公田·均田制)의 이상을 부활하여 전면적인 전제개혁을 단행하려는 개혁주의적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토지겸병과 수조(收租)의 문란을 다소 완화, 조정하여 지주제를 안정시키려는 소극적인 개량주의적 입장이다.
개혁주의나 개량주의나 성리학자라는 점에는 같지만, 그들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의 차이가 급진파와 온건파의 분화를 가져온 주요한 요인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급진파에 비해 온건파 성리학자들이 토착지주적 기반이 견고한 편이며, 따라서 전면적 전제개혁이 실현될 때 그들이 큰 타격을 입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급진파의 전제개혁은 본래의 이상에는 훨씬 후퇴된 상태로 실시되었으므로, 토착지주의 경제기반이 송두리째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개혁파의 중앙집권정책이 계속 강화됨에 따라 재지지주(在地地主)의 경제기반은 크게 약화되었다.
15세기의 관학파(官學派) 성리학자와 정통파(正統派) 성리학자와의 끊임없는 갈등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사회조건 아래에서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16세기를 전후하여 관학파 성리학자들도 국가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를 바탕으로 차차 대지주로 급성장하면서 점차 보수화하게 되자, 이제는 재지(在地)의 중소지주 사림파(士林派)가 새로운 개혁주의자로 등장하게 되고, 이이(李珥)와 같은 보다 적극적인 개혁주의자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대체로 15, 16세기는 고려 말기나 조선 후기와 같이 토지제도가 극도로 문란하거나 빈부의 격차가 격심하였던 시기는 아니며, 따라서 이 시기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전면적인 전제개혁사상은 전개되지 않았다.
14세기 말의 전제개혁론자들은 정도전·조준(趙浚)·허응(許應)·이행(李行)·조인옥(趙仁沃)·황순상(黃順常) 등을 들 수 있는데, 여기에서 정도전은 계민수전(計民授田)을 통한 균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공전을 지지하되 정도전과 같은 균전론을 주장하기보다는 고려 초의 공전·균전을 부활하려고 하였던 것이라 하겠다.
정도전에 의하면, 옛날에는 토지의 사유가 없었기 때문에 누구나 관(官)이 지급한 전지(田地)를 경작하여 빈부강약의 차이가 심하지 않았고 국가도 수입이 많아 부유했지만, 전제가 문란하여져 겸병이 행하여진 뒤에는 빈자(貧者)는 ‘입추(立錐)의 여지(餘地)’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부자의 땅을 경작하게 되므로, 고생하여 농사를 지어도 먹고 살기가 어렵게 되었고, 국가는 더욱 가난해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일부 인사들이 말하는 한전론이나 균전론은 고식지계(姑息之計)라고 비판하고, 고대의 공전·균전(계민수전)의 전제를 이상으로 여겼던 것이다.
고대의 전제가 공전·균전인 것과는 달리 후세의 전제는 사전·지주제로 특징지으며, 이러한 후세의 전제는 병작인(倂作人)의 몰락과 국가의 빈곤, 그리고 빈부의 격차를 극대화시킨 결과를 초래하였고, 특히 고려 말기의 전제는 이와 같은 모순이 극도에 도달한 상태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고려 말의 전제개혁이 물론 정도전 본래의 이념대로 실현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사전을 모두 혁파하고 몰수하여 공가(公家)에 귀속시킨 다음 계민수전하여 고대 전제의 올바름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대지주와 세신거족(世臣巨族)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음을 스스로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전제개혁사상은 당대의 급선봉이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태조에서 성종대에 이르는 15세기는 고려 말의 전제개혁운동의 연장기로서, 이 시기에는 한편으로는 새로운 전제의 모순이 완만하게 싹터서 자라나는 양면성을 노정하게 되었다.
공전제의 실현이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하고 이와 표리를 이루는 균전의 문제도 비록 계민수전의 이상을 실현하지는 못했으나, 많은 경작농민을 자작농으로 해방시킴으로써 자작농이 병작농을 수적으로 압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면적인 제도적 개혁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토지매매와 겸병을 통한 토지집적현상이 완만하게 성장하고, 이에 따라 병작반수제(倂作半收制)가 점차로 관행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전제에 관한 논란이 보다 심각성을 띠고 나타난 것은 16세기 이후부터이며, 관심을 집중시킨 것은 한전제와 균전제였다.
조광조는 대토지소유자인 훈구파(勳舊派)의 경제적 기초를 약화시키려는 목적과 관련해 토지겸병을 반대하고 한전제를 주장하였다.
한전제는 물론 지주제 자체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소유의 상한을 제한하여 토지소유의 극심한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이러한 주장도 당시의 실정으로서는 어느 정도의 진보성을 띠는 것이었다.
조광조의 한전론은 방납시정론(防納是正論)과 더불어 그의 경제사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토지겸병이 한층 더 성행하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전제개혁론도 고조되었는데, 이 시기의 대표적 사상은 이이의 경제사상을 들 수 있다.
이이는 자기의 시대가 창업과 수성(守成)을 거쳐 중쇠기에 접어들었다고 인식하고, 중쇠기의 침체와 문란을 극복하려면 변법(變法)과 경장(更張)의 사회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개혁사상은 전제개혁보다는 공납(貢納)·진상(進上)·군포(軍布)·공천선상(公賤選上), 왕실의 사치 등 주로 수취체제(受取體制)의 문란을 개혁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제사상은 정전제(井田制)에 두고, 왕도(王道)에 도달하려면 “제산(制産)에 있어서 정전의 뜻을 얻게 하고 용인(用人)에 있어서 주관(周官)의 빈흥제(賓興制)에 합치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토지에 제한이 없어서 빈부의 격차가 격심’하여 정전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것을 한탄하였다.
이러한 이이의 사상은 조선 후기의 실학파에도 연결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제사상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고려 말의 전제개혁론보다는 적극적일 수 없는 여건이 주어졌다는 점인데, 대체로 세종조 이후 토지사유제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됨으로써 토지소유제도보다 오히려 전세제도(田稅制度)에 관해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고 하는 측면이다.
당시의 양전(量田)에서는 토지의 비옥도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조세가 공평하게 부과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손실에 따라 세액을 감면하는 수손급손법(隨損給損法)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세종 때 변계손(卞季孫)이 전지의 등급을 정해 차등과세할 것을 주장하였고, 진중성(陳仲誠)은 차등제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으며, 하연(河演)은 연분구등제(年分九等制)를 진언하였다. 결국, 하연의 제안은 세종 26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에서 정한 전분육등·연분구등의 제도에 크게 반영되었다.
상업은 억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 시기에 있어서 하나의 통념이었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면 상대적으로 농업인구를 감소시키고 가장 중요한 산업인 농업을 쇠퇴시킬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억상론(抑商論)을 주장했던 것이다. 1420년의 상소문에서 최만리(崔萬里) 등은 물가가 등귀하는 원인이 상공인의 조작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1439년(세종 21)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안순(安純)의 상소에 따르면, 수해나 한해(旱害)를 한번 만나면 굶주리는 사람이 속출하는 것은 백성이 농업을 버리고 말업인 상공업에 종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상업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통제되어야 할 말업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왕가(王家)에 흉사가 있을 때는 철시를 명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표현되는 직업의 귀천을 명백히 하였다.
다시 말하면, 상업을 생계의 수단으로서만 인정하고 상업자본 축적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멸시를 당했던 것이다.
자본축적이 환영받지 못한 것은 고리대자본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리대업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지만, 고율의 이자를 취득하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했다가 추수기에 50%의 이자를 가산하여 징수하는 장리(長利)가 일반적인 대차형태(貸借形態)였고, 이와 같은 장리가 서민층의 생활을 압박했던 것이다.
무역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는데,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무역하는 것은 고금의 상례이니 이웃 나라와 무역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웃 나라라 하더라도 정부는 당연히 무역에 대해 간섭하였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대국란으로 우리 나라는 심각한 재정위기에 봉착하였고, 대중의 생활은 매우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뒤 평화가 유지되자 이앙법(移秧法)과 수리시설의 보급, 지대형태(地代形態)와 농업경영양식의 변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상품 및 화폐유통의 촉진 등 전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고, 신분제도의 동요도 하나의 사회적 추세였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도 동요가 심한 때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은 초기 중상주의(重商主義) 단계부터 있었던 현상이었지만, 기독교의 포교활동과 일체가 되어 서양인의 동양진출은 더욱 적극성을 띠게 되었다.
1614년(광해군 6)에 편찬된 ≪지봉유설 芝峰類說≫에서 이수광(李睟光)은 <만국여도>와 <천주실의> 등을 인용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과 천주교 교리를 소개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화이사상(華夷思想)으로부터 새로운 세계관을 갖게 하였다.
천주교의 전래와 때를 같이하여 소개된 서양에 관한 여러 가지 선진적 지식은 새로운 학풍의 조성에 있어서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편, 우리 나라의 성리학은 주자학 일색으로 연구되고 있었는데,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송·명보다도 한층더 실증성이 박약한 공리공론의 성격을 띠었고, 그에 따라 가치우위의 명분론적 합리주의만을 절대시하는 경향에 대한 비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정부의 위기를 타개하려는 여러 가지 사회정책이나 농업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17세기 중엽 실학사상(實學思想)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실학사상은 성리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때, 실학사상의 맹아(萌芽)는 성리학이 도입되던 당시에 발생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실학은 조선 후기에 비로소 대두된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나타났던 사상이라는 것이며, 이 사상은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항상 새로운 내용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전통유학과 배치된다거나 이를 반대하는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유학의 내재적인 사상의 일면이 강조되어왔다는 점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정도전·김시습(金時習)·이이의 글에서 실용적 개량주의를 간취할 수 있는데, 특히 김시습의 현실비판의식은 이이의 개량주의적 시무론에 영향을 미쳤고, 이이의 학풍은 조선 후기 실학선구자들에 의하여 수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실학이 고려 말 조선 초의 실학과 구별되는 것은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의 화폐경제 및 상공업이 발달하여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새로운 산업사회의 변화에 따른 전환기에 발생하였으며, 이 사상은 새로운 사회를 전망하면서 근대산업사회의 이념을 조성해내었다는 점에서 고려 말 조선 초의 실학사상과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경세치용(經世致用)·이용후생(利用厚生)·실사구시(實事求是)의 특성으로도 분류되는 실학은, 이수광·한백겸(韓百謙)·허균(許筠)·김육(金堉)의 선구적 구실을 바탕으로 유형원(柳馨遠)에 이르러 그 발생을 매듭짓게 된다. 1670년대 초까지 완성을 본 ≪반계수록 磻溪隨錄≫은 그 대표적 업적인 것이다.
18세기 이후 실학은 크게 발전하였는데, 유형원의 실학체계를 한층 더 심화시키고 실학사상을 견고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이익(李瀷)이었다.
그는 이이와 유형원을 숭앙한 남인계 학자로서 유형원의 경세치용론을 추상화하여 한층 더 높은 단계로 발전시켰다. 한편, 경세치용학파에 뒤이어 북학파 학자를 중심으로 한 이용후생학파가 실학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실학사상이 전성기를 이룬 것은 영조·정조연간이었다. 이때는 경세치용론이나 이용후생론과는 관계가 적은 역사·고증학·지리·한학 등 직접 실용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 하더라도, 실증적·합리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학풍을 수립한 학자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실학의 경세치용·이용후생·실사구시의 특성이 집대성된 것은 정약용(丁若鏞)에 이르러서였다. 이러한 실학을 중심으로 전환기의 경제사상을 살펴보기로 하자.
국가재정의 토대가 농업에 있는 전근대사회에 있어서 농업사상은 경제사상의 중심을 이루게 되고, 그것은 중농사상일 수밖에 없지만, 실학파에 의한 중농사상은 한층 체계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실학을 집대성했던 정약용은 농업이 천하의 대본임을 전제하고 천시(天時)·지리(地理)·인화(人和)의 삼위일체적 관계를 논하였다.
즉, 생산요소로서의 자연과 노동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농업이란 인간이 천시와 지리를 잘 이용해 토지생산물을 증식시키는 행위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백성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원천으로 보는 것이다.
실학파의 중농사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상공업의 억제를 농업발전의 필요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공업의 비대화가 농업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히려 상공업의 균형적 발전이 농업발전에 있어서 유익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전통적 농업사회에서 한 나라의 노동량이 일정하다고 할 때 상공업인구의 상대적 증가는 농업인구의 상대적 감소를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농업의 쇠퇴와 직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중농억말사상(重農抑末思想)은 정약용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논리는 말업의 억제가 곧 농업의 발전이라는 전통시대의 농업사상과 같은 것이다. 그는 수안금광(遂安金鑛)의 예를 들어 농민들이 영농을 포기하고 금광으로 쏠리기 때문에 농업이 쇠퇴함을 지적하였다.
한편, 농상공업의 균형적인 발전을 주장한 대표적 학자로는 유수원(柳壽垣)·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을 들 수 있다. 이들도 농업을 천하의 대본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상업의 발달이 농업을 저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교통이 편리해지면 오히려 그것은 농업의 발달에 긍정적 구실을 할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이 상업을 말업시하고 억말정책을 강행하던 사회에서 대두한 상업옹호론은 18세기 후반기의 상업의 발달을 대변한 것으로서 혁신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이다.
실학파의 농업론은 기술과 정책에 관한 당면한 문제를 다룬 것이므로 이것은 일종의 농업진흥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사 직전에 있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첩경이 농업진흥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농업진흥에 관한 방안을 제시하였다.
예컨대, 유형원은 토지제도만 바로잡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았고, 이익은 농업발전의 저해요인으로서 노비제도·과거제도·벌열제도(閥閱制度)·기교(技巧, 妓敎)·증니(憎尼)·유타(遊惰) 등 여섯 가지를 열거하여, 이와 같은 요인만 제거하면 농업은 발전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비하면 정약용의 농업진흥방안은 한층 분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농업이 다른 직업보다 못한 것이 셋 있는데, 사회적 지위는 사(士)만 못하고, 이윤은 상업만큼 많지 않으며, 편하기는 공장(工匠)만 못하다.”고 하였다.
요컨대, 농업을 진흥시키려면 농업의 지위향상과 이윤보장 및 기술개선을 통한 토지생산성의 향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정약용 이외에도 농업기술과 정책면에서 개선방안을 논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유형원은 당시 폐허상태에 있던 김제의 벽골제(碧骨堤), 고부의 눌제(訥堤), 익산·전주 사이의 황등제(黃登堤)를 보수하여 이용하면 우리 나라 조세의 절반을 부담하는 호남지방의 흉년이 영구히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편, 높은 지역에 있는 대규모의 저수지를 이용할 수 없을 때는 낮은 곳의 물을 양수(揚水)해야 하는 까닭에, 많은 지식인들이 수차(水車)에 관해 연구하고 보급의 시급함을 역설하였다.
유수원은 문종과 효종이 수차를 널리 권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보급이 잘 안 된 것은 농민들이 게을러 농업에 힘쓰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고, 농업에 있어서의 수리(水利)의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안정복(安鼎福)·박제가·정약용도 수차의 도입을 역설했다.
수리문제 다음으로 실학파 학자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권농관제도(勸農官制度)와 농가부업이다. 안정복과 우하영(禹夏永)은 동단위(洞單位)로 1인의 농관(農官)을 두어 철저하게 농사지도를 하면 성과가 클 것으로 보았다.
무엇보다 실학파 개혁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토지제도론이다. 농업사회에 있어서 토지는 생산요소로서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지만, 토지국유를 표방하면서 지주적 토지소유와 소작제도가 보편화하여 불균형의 극대화가 사회문제로 대두될 때 토지제도는 재검토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집권적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 지주적 대토지소유제도는 바람직한 것이 못 되며, 지주적 대토지소유에 따른 소작농의 전면적 빈곤화는 유교이념의 실현을 저해하였다.
그리하여 실학파의 경제사상가들은 일반적으로 토지겸병으로 표현되는 지주적 대토지소유를 반대하였다. 실학파 토지제도론자에게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토지겸병의 반대와 정전제의 영향이다.
토지겸병을 지양하는 토지개혁의 모형을 일차적으로 정전제에서 찾으려 하였고, 정전제의 본질을 살리는 방향에서 개혁의 지표를 선정하였던 것이다. 정전제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유형원이었다.
그는 옛 정전제를 예찬하여 정전제로써 토지의 경계가 바로잡히면 만사가 바로 서서 백성은 항업(恒業)을 갖게 되고 병역기피자가 없어지며, 인심이 안정되고 풍속이 순후(淳厚)해져서 국가의 토대가 견고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후세의 모든 사회적 폐단과 정치적 혼란의 원인은 토지제도의 문란과 대토지의 사점(私占)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후세에 와서 토지의 고저와 굴곡이 지형적 조건 때문에 정전제를 실시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논자(論者)들이 옛 정전제를 깊이 연구하지 않은 데서 온 것이라고 하였다.
지형이 넓지 않더라도 토지국유제도를 실시하여 10분의 1의 세율로 조세를 징수하면 정전제와 같은 효과를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유형원은 정전제의 변형으로서 과전제(科田制)를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의 토지면적 단위인 결부법(結負法)은 비옥도에 따라 면적이 다르기 때문에 과세상의 의미가 있을 뿐 실지의 토지면적을 파악하는 데는 불편한 점이 많았으므로, 그는 경무법(頃畝法)을 채용하여 현직관원에게 차등 있게 토지를 지급하고자 했다. 유형원 이후 1세기 동안 토지제도에 관한 사상은 균전론(均田論)이 지배적이었다.
유형원이 토지생산성을 인위적으로 증대시킬 수 있다고 믿고 경무법에 의한 과전제의 실시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데 반하여, 정상기(鄭尙驥)·이익·홍대용(洪大容) 등은 과전론의 비현실성을 지양하면서 정전제의 정신을 살리고 확대되어가는 토지겸병의 해결책으로서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정상기는 공사(公私)의 모든 농지를 집계하여 분배할 단위를 정하되, 그 단위는 인구와 비옥도 등을 참작하여 결정하며, 분배의 규모는 50부(負) 내지 1결(結)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익은 농가보유지의 최저한도를 50무(畝) 정도로 정하여 그것을 영업전(永業田)으로 하며, 영업전의 매매를 법으로 금지하는 한편, 비영업전에 자유처분권을 부여하면 장기적으로 토지보유의 상태가 균형을 이룰 것으로 보았다.
균전론은 그 뒤 홍대용에 의하여 계승되었는데, 그는 전국의 토지를 기혼남에게 2결씩 분급(分給)하고 수확의 10분의 1을 조세로 부과하면, 정전제의 이상을 살리고 개인의 토지소유를 부정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균전론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한전론(限田論)을 주장한 사람은 박지원이었다. 그는 전국의 토지를 호수비례(戶數比例)로 균분하여 농가의 소유면적의 상한을 법으로 제한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소유의 균등화를 기하려고 했다.
실학파의 토지제도론을 집대성한 사람은 정약용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선배 실학자들의 과전·균전·한전론을 검토하고, 여전제(閭田制)만이 경자유전(耕者有田)으로 되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토지소유형태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균전제와 한전제에서 비농업부문에 종사하는 사람에게까지 토지를 지급하는 것은 놀고 먹는 습성을 조장하는 것이므로 비생산적이라고 보고, 사(士)를 비롯한 상인과 수공업자 등 농민이 아닌 자를 토지의 분배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경작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갖게 하는 여전제를 주장하였다. 여전제란 산천의 지세를 기준으로 일정한 구역을 1여(閭)로 하는 공동체제도로서, 농사지도자격인 여장(閭長)의 지도에 따라 공동으로 경작하고 투하된 노동량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 공동체간의 비옥도나 인구증가율의 차이는 인구이동으로 조절될 것으로 보고, 조정이 끝나면 철저한 통제로써 인구이동을 저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이러한 제도의 개혁사상 못지않게 17세기 중엽 이후 우리 나라의 농업은 이앙법의 보급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로 농업의 기술과 경영면에서 큰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강희맹(姜希孟)의 ≪금양잡록 衿陽雜錄≫,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山林經濟≫,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박지원의 ≪과농소초 課農小抄≫, 우하영의 ≪천일록 千一錄≫, 정약용의 ≪농책 農策≫ 등 실학파의 저서 중에는 농업기술 및 정책에 관한 것이 많았으며, 이는 농업생산성문제를 중시한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농본상말사상은 사회의 통념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직업의 우선순위가 전기와 다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상업관에 대해서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즉, 농업이 가장 중요한 산업이라는 점에 대하여 이론(異論)을 제시한 사람은 없었지만, 상업을 천시하는 경향에 반대하고 상업장려의 필요성과 상업입국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중국에서도 상업이 크게 발달하여 어느 정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지만, 실학자들이 표면적으로 상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상업입국론을 주장하게 된 것은 국내상업의 발달에 힘입은 것이라 하겠다.
상업진흥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대표적 인물로 유수원과 박제가를 들 수 있다. 유수원은 상말사상(商末思想)을 부정하고 상업을 실업상태에 있는 사족(士族)의 돌파구로서 매우 적절한 업종으로 생각하였다.
유수원의 ≪우서 迂書≫에 따르면 당시의 우리 나라 상업은, 말은 있으나 노새가 없고, 선박은 있으나 수레가 없었기 때문에 선상(船商)보다는 마상(馬商)이 많고, 마상보다 부상(負商)이 많은 형편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의 부자들은 행상에게 자본과 상품을 공급하여 지방에 가서 팔게 했고, 지방상인들이 상품을 가지고 상경하여 판매하는 일이 많았으나, 수레 및 선박과 같은 운반수단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윤이 적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는 상업에 있어서의 공동경영의 필요성을 논한 자리에서 중국의 예와 같이 대상인이 많은 자본을 내어 점포를 설치하고 소판자(小販子)는 그 점포에서 상품판매에 종사하게 하면, 오늘날 표현으로 노사협조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는 중국에 비해 상업자본의 축적이 빈약하였던 것만은 사실이었지만, 동과형태(同夥形態)의 공동경영을 하면 자본조달이 용이하고 상업세를 징수하는 데도 편리하다고 판단하였다.
박제가는 상업을 천시하는 사상에 반기를 들고 양반도 상업에 종사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 점에서 유수원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지만, 그는 국가의 상업통제를 환영하지 않았다.
유수원은 국가의 상업통제를 전제로 한 경영합리화를 추구하였음에 대하여, 박제가는 상업발달의 저해요인을 제거하면 상업은 저절로 발달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논한 가장 큰 저해요인은 교통수단의 낙후성이었는데, 유수원보다 한층 더 체계적으로 교통수단 개혁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영남의 고찰(古刹)에서는 과거볼 때 사용하는 명지(名紙)가 생산되고, 청산(靑山)과 보은에서는 대추나무숲이 많으며, 강화에서는 감이 많이 생산되지만 잘 유통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운반수단이 발달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하며, 따라서 상업이 발달하려면 우선 성능이 좋은 수레와 선박이 보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박제가는 또 외국무역론을 체계적으로 논하였는데, 그 이전에도 외국무역에 관해 단편적으로 논한 사람이 있기는 하였으나, 무역문제를 체계적으로 검토해 무역입국론을 주장한 대표적 학자로는 그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국가는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잘 해야 한다.
농업과 상공업이 발달하여 국내의 자원을 최대한 이용하여야 하겠지만, 한편 그는 외국물품이 유통된 뒤에 국내의 재화량이 증대되고 각종기구의 생산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당시 우리 나라의 외국무역은 매우 저조하였다. 송나라 때 배로 고려와 통할 시기에는 명주(明州)에서 7일 만에 예성강에 닿아 교류가 활발하였으나, 조선이 건국된 뒤에는 외국선박의 내왕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그는 무역이 발달하면 솜옷 대신 비단옷을 입을 수 있고, 벽지 대신 죽지(竹紙)에 글을 써도 여유가 있을 것으로 보고, 무역발전을 위한 해운업 발달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17세기 중엽 이후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였으나 19세기 후반까지 여전히 자급자족적 농업사회를 면하지 못했다. 피지배층에 대한 관리의 수탈은 이 시기에 와서 더욱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삼정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여 백성의 불만은 고조되었고, 봉건체제는 붕괴기에 도달하였다.
1862년(철종 13)의 진주민란 이후 연쇄반응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는 관리의 수탈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봉건적 지배체제에 대한 반항이었다. 한편, 서세동점의 현상은 이 무렵에 와서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서양의 거대한 함선의 빈번한 출몰과 아편전쟁(1840∼1842), 영·프랑스연합군의 북경침략(1860) 등은 서세동점의 구체적 형태였으며, 이와 같은 사건들로 말미암아 국민의 위기의식도 날로 높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난국을 맞아 당시의 세도정치 아래에서는, 정부는 내정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거니와 서구세력에 대해서도 뚜렷한 정책목표가 없었다. 당시 세도정권은 서구세력의 진출에 대해서 일관된 원칙이 없이 즉흥적으로 대처하여 난을 면하고 있었을 뿐이다.
서구세력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대응책을 강구한 것은 고종의 등극과 더불어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에서 비롯한다. 흥선대원군은 천주교가 서구세력진출의 첨병이라 하여 이를 엄중히 탄압했고, 서구의 통상요청은 국권의 침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하여 무력을 동원하여 이를 격퇴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강경한 쇄국정책을 실시한 배경에는 당시 동양에 진출한 서구세력의 침략적 태도에도 깊은 관계가 있었으나, 그렇다고 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이 영구적인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외세를 맞아들이기에 앞서 국권을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가 쇄국하는 참뜻이 아닌가 생각되는 점도 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과 더불어 그의 정치적 운명을 걸고 내정개혁을 착수한 것은 이러한 원대한 뜻의 발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는 서구사상의 유입에 관해서는 엄중히 경계하면서도 서구의 과학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제형(朴齊炯)의 ≪근대조선정감 近代朝鮮政鑑≫에 의하면, 대원군은 서구의 기선과 군기(軍器)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제조를 국내에서 시도한 바 있다고 전한다.
그는 대동강에서 침몰된 미국상선 셔먼호를 건져내어 이를 한강에 끌고 와서 우리 나라 기술자에게 이를 본뜬 철갑선의 건조를 명한 바 있었고, 서구의 군기를 본받아 총포와 화약을 제조할 것을 지시한 바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이와 같이 서구의 과학문화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 서구의 과학을 올바르게 도입할 길은 없었다.
1873년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고종의 친정에서 실권을 잡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그의 척신(戚臣)들은 흥선대원군과 같은 강직한 신념의 정치가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약체화된 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틈을 타서 일본은 군사적 위협으로 1876년 개항을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서구제국의 상선이 내항한 당시의 국정의 실권을 담당한 정부는 보수적이고 서구문화에 대하여 지극히 소극적이었지만 재야(在野) 청년지식층에서는 진취적이고 혁신적인 세력이 태동하였다.
이들은 당시로서는 해외사정에 밝았던 오경석(吳慶錫)·유대치(劉大致)·이동인(李東仁) 등과 자주 접촉하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서구문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된 청년들이었으며,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 등이 그 중심인물이었다.
다만, 이들은 고종친정의 정부가 수립되는 시기에는 10대 내지 20대의 청년이었고, 따라서 정부의 요직에는 등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개항 당시에는 그들의 관심사가 정부에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강화조약체결 후 정부는 그 해 5월 김기수(金綺秀)를 수반으로 하는 수신사절단일행 28인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서구문화를 한걸음 앞서 도입한 일본 내의 각종 근대기술·문화시설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김굉집(金宏集)이 일본에 다녀왔고, 이어 1881년 박정양(朴定陽)을 수반으로 한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 신사유람단에는 어윤중(魚允中)·홍영식·윤치호(尹致昊)·유길준 등이 참가하여 일본의 동경(東京)·대판(大阪) 등을 유람하면서 근대산업시설을 시찰하였다.
이때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던 유길준 등은 일본에 남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또 한편, 1881년 김윤식(金允植)을 수반으로 한 영선사(領選使)를 청나라로 파견하였으며, 이때 그는 국내청년 69인을 대동하여 톈진(天津) 기기창(機器廠)에서 근대적 병기제조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개항 후 정부는 여러 차례 청나라와 일본에 사절을 보내어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청일 양국의 실정을 탐문하게 했으며, 이들의 귀국보고에 자극을 받은 당시 조야(朝野)에서는 서구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883년 10월 정부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 박문국(博文局)을 두고, 여기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 漢城旬報≫를 발행하면서부터 개화사상을 급속히 국민들에게까지 파급시켰다.
한편,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가 서학(기독교)에 대립하는 민족종교로서 동학을 제창하여, 사회적 세력으로 확대되었는데 그 절정에 이른 것은 1894년(고종 31)의 전라도 고부(古阜)의 민란에서 발단된 동학농민운동이었다.
‘척왜양이(斥倭洋夷)’를 기치로 안으로는 양반중심의 봉건적 체제에 대항하고 밖으로는 외국의 자본주의 침략, 특히 일본상인의 경제적 침입에 대항하여 싸운 동학농민운동이었지만, 근대지향적인 성격으로까지 전개되지 못한 점은 그 한계라 할 수 있다.
즉, 동학농민운동에서는 부국사상(富國思想)은 있었어도 부민사상(富民思想)은 결여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봉건적 질서의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한편, 개화사상은 1870년대에는 개항하여 해외사정을 파악하는 데 있었고, 1880년대에는 선진기술의 흡수에 따른 부국강병론에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후에는 외세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완전자주독립에 대한 민족적 자각 또한 높아졌다.
그리하여 외세의 극복과 자주독립의 전제로서 개화운동이 전개되었고, 민권(民權)과 국권(國權)을 강조한 독립협회의 활동과 개화운동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개화파도 농업을 가장 중요한 산업으로 간주하였으며, 특히 부국강병의 기초로서 농업을 중요시했다. 즉, 농업생산성의 전면적 향상이 국부를 증대시키고 상공업의 발달을 추진시킬 것으로 이해하였다.
1880년대 후반 각종 서적을 통하여 서양의 근대문명을 소개하는 기회가 많았으며, 1896년 7월 25일자의 ≪독립신문≫ 사설에는 서양의 근대적 농업기술의 도입을 역설하였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농업은 곡식을 심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양잠·목축·과수 등의 농사로 넓게 해석하고, 농공상부(農工商部)는 외국의 농학서적에서 필요한 것을 번역하여 전국의 농민들에게 새로운 경영방법과 농기계의 발명의욕을 북돋아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종자를 구입해 농민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각종 종자를 개량해야 한다는 품종개량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이와 같이, 개화파의 농업론은 실학파의 중농사상을 바탕으로 농업의 기술적인 진보를 도모하고자 했다.
한편, 토지제도론에서는 실학파와 같은 많은 논쟁이나 관심은 크지 못하였지만, 이기(李沂)·유길준 등의 사상에서는 비교적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현저한 차이점으로는 토지제도의 사유제를 주장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기는 토지의 사유제를 인정하면서 토지겸병을 막기 위해 전지(田地)의 사적 매매를 엄금하고, 국가가 원매자로부터 민전을 구매하여 공전화하는 방향에서 해결의 길을 모색하였다.
그의 ≪해학유서 海鶴遺書≫에는 명쾌한 논리전개가 뒤따르지는 않았으나, 그는 토지의 사거래 금지가 외국인의 토지매수방지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전조(田租)와 도조(賭租)를 정액화하여 사회적 부조리를 제거하고, 소작농의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에서 결부법을 두락법(斗落法)으로 고치고, 공사세(公私稅)의 비율을 조절하려고 하였다.
유길준도 이기와 같이 실학파의 토지제도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보다 철저한 토지사유를 주장했다. 유길준은 실학파의 균전사상의 시대적 제약성을 이해하여 그와 같은 비현실적 토지제도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유길준도 전정문란의 원인을 결부법에 있다고 보고, 지형과 지적 등을 고찰하여 경계를 먼저 정한 다음 경무법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선 전국의 토지조사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할 것을 구상하였으며, 경계에 관한 문제는 이를 통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그는 토지사유제를 지지했으나, 토지의 재분배보다는 소작료의 비율을 조정하여 소작인이 10분의 7을 가지게 하면 어느 정도 균전제의 이상을 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실학파의 상업론은 수공업단계의 공업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인접국을 상대로 한 무역론인 데 반하여, 개화파의 그것은 탈수공업적이었으며 소규모거래가 아니라 전세계를 범위로 한 대규모의 상업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특히, 이 시대의 개화사상은 1883년에 창간되어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던 ≪한성순보≫와 1886년 1월 ≪한성순보≫의 속간으로 나온 ≪한성주보≫를 비롯해, 다시 1888년 7월 주보가 종간된 이후 1896년 서재필에 의한 최초의 일간 민간지인 ≪독립신문≫ 등과 같은 신문의 사설 등에 소개되고 주장된 서구문명과 근대화의 필요성의 역설에서 크게 고취되었다.
개항 이후 1880년대는 조정 안에서도 개화운동이 싹트고 있었을 때였다. 정부는 관서(官署)의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을 강구했으며, 우리 나라의 상공업계에서는 개항장에 진출한 외국상인과 경쟁하기 위해 근대적 회사설립을 서두르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한성순보≫가 간행되어 국내외의 정치·경제 실정을 국민에게 알리면서 서구자본주의문화를 소개한 것은 상공인의 의식개혁과 근대적 상공업혁신에 큰 영향을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상업계에 서구의 회사조직을 소개한 것은 1882년 유길준이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서술한 ≪상회규칙 商會規則≫이 그 효시이나, 이 저술은 간행되지 않아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그 뒤 1895년 ≪서유견문 西遊見聞≫에 수록되었을 때 비로소 일반에게 널리 읽혀지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서구의 상업방법과 회사조직을 소개한 것은 1883년 10월 21일자의 ≪한성순보≫에 소개된 ‘회사설(會社說)’이며, 이 논설은 널리 상공인에게 알려져 당시 상인들의 근대회사설립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회사설립에 관해서는 이 밖에도 1884년 3월 18일자 ≪한성순보≫의 국내사보란(國內私報欄)에 우리 나라 안에 설립된 회사를 소개하면서, 서구의 공제회사·자본회사·원재회사·기계회사·공수회사(共需會社) 등에 관하여 그 설립의 필요성과 설립절차를 논한 바 있었다.
그리고 1896년 9월 15일자의 ≪독립신문≫의 논설에서는 ‘권공장(勸工場)’이라 칭하는 일종의 공장학교를 세워 공업기술을 보급시키는 것이 정부의 급선무임을 역설했는데, 이것은 정부주도형 기술교육에 대한 개화파의 구체적 방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개화파의 경제사상을 부국론에서 찾아볼 때, 상업과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영국의 세계적인 국력과 중국의 낙후성을 원인별로 비교, 분석하여 논한 ≪한성순보≫ 1884년 5월 25일과 6월 4일자에 실린 부국론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성순보≫와 ≪한성주보≫는 앞에서 예시한 회사설이나 부국론 외에도 당시 한국의 조야에서 알고 시행해야 할 많은 경제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 중 중요한 것을 열거하면 전기론(한성순보 제6호)·보험론(한성순보 제6호)·운수론(運輸論, 한성순보 제12·13호)·직포국집고설(織布局集股說, 한성순보 제15호)·박람회설(한성순보 제15호)·국채론(한성순보 제27호)·논화폐(論貨幣, 한성주보 제4호)·광산개발론(한성주보 제22호 및 제28호)·통계설(한성주보 제27호) 등이며, 이들 논설을 보면 당시 우리의 정부나 상공업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서구의 예를 들면서 상세히 논술하고 있다.
결국, 개화파의 경제사상은 일본의 근대화에 자극받은 지식인의 부국강병사상으로서 근대 서구의 과학기술문명과 회사경영을 통한 중상주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말 이후 일제의 식민지체제 내에서의 경제사상은 서구의 자본주의경제사상을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한쪽에서는 사회주의경제사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분단 이후 남북한이 상호 이질적인 경제체제와 경제사상으로 대립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아직도 많은 연구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