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직뉴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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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섬유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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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조기준 (전 고려대학교, 경제사)
  • 최종수정 2026년 02월 20일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으로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1911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섬유 업체.

내용

1910년 서울 광희문(光熙門) 일대의 섬유가내공업자인 이정규(李正珪) · 김성기(金聖基) 등이 주동이 되어 합명회사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1911년 6월 주식회사로 조직을 바꾸고, 신문에 주식 모집 광고를 냈다.

발기인은 안태영(安泰瑩) · 김성기 · 김용태(金溶泰) · 조종서(趙鍾緖) · 이정규 · 김용달(金容達) · 박승원(朴承元) 등 8명이었고, 자본금은 10만원, 총 주식 수는 2000주였으나 그 반은 공모할 예정이었다. 1912년 5월 사장에 윤치소(尹致昭), 전무에 안태영, 이사에 김용태, 감사에 장도(張燾) · 박만서(朴晩緖) 등으로 구성되었다.

회사는 당시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공업 회사 중 가장 큰 규모로, 1911년 당시 낭뉴편기(囊紐編機) 40대, 요대편기(腰帶編機) 8대, 단임기(端袵機) 26대 등의 기계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주요 생산품은 허리띠 · 대님 · 주머니끈 등 끈 종류였고, 양말 · 장갑 등도 생산했으며, 약간의 직물도 생산했다. 1915년의 경우 직뉴생산이 전체 생산액의 37%를 차지하였고, 1917년의 경우 서울 전체의 끈 생산액 중 47.9%를 차지했다.

그러나 1915년 이후 간부진의 부실한 경영 등과 영업 부진으로 경성방직의 설립자인 김성수(金性洙)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새로운 경영주로 등장한 김성수는 영업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조처로서, 1918년 신식직기를 도입하여 모시와 면포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1922년에는 고무 제품까지도 생산하는 등 제품의 다양화에 노력하는 한편, 1925년에는 회사명을 중앙상공주식회사로 개칭하며 무역과 창고업까지 경영하였다. 1944년 경성방직주식회사에 흡수, 합병되었다.

참고문헌

  • - 『朝鮮總督府統計年報』

  • - 『朝鮮經濟年鑑』(京城商工會議所)

  • - 『재계회고』(서울경제신문, 1975)

  • - 「한국민족자본형성사」(조기준, 『한국현대문화사대계』Ⅳ 정치·경제편,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78)

  • - 「경성직뉴주식회사의 설립과 경영」(권태억, 『한국사론』6,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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