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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방직 초기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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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면방직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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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면방직회사.
개설

설립 당시 민족계 기업체로서는 최대 규모의 근대식 제조업체로, 민족의 성원과 기대 속에서 김성수(金性洙)에 의해 설립되었다. 1900년대 초부터의 일본의 면직물 및 면방직 자본의 거센 진출에 대항하여 자립경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민족자본을 규합, 민족기업임을 표방하면서 설립하였다.

연원 및 변천

일본의 공장제 면직물이 대량으로 상륙하여 우리나라의 재래식 면직업을 압박하기 시작하여, 1905년을 전후한 농촌 수공업은 거의 모두가 몰락하고 말았다.

농촌 수방직업의 몰락과 때를 같이하여 서울을 비롯한 인천 · 부산 · 대구 · 평양 · 의주 등지에서 민족계 기업인에 의한 전업적인 면직업이 싹트기 시작했으며, 그들 기업인들은 개량된 기계를 도입하여 규모는 작았으나 차차 조직된 기업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본이 영세하여 일본인들의 공장제 면직물의 대량 유입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1910년 말 민족계 면직공장은 83개소나 되었으나, 그 자본금은 62만 9000여 원에 불과하여 중소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1911년, 서울 광희동일대의 영세면방직업자들은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세웠으며, 1917년 일본 방직계의 내외방직회사가 부산에 진출, 조선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가 가동되면 민족계 군소방직업계는 몰락하고 일본제품이 면직물시장을 독점하게 될 상황이었으므로, 민족계 자본을 동원하여 설립을 보게 된 것이다.

그에 앞서 김성수는 이강현(李康賢)의 조언으로 방직회사 설립의 뜻을 굳히고 경영난으로 도산의 위기에 있던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회사 설립을 위해 설립자 김성수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거족적인 협조를 구하였다. 사기업체의 설립에 그와 같이 거족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민족경제의 자립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창립 이후에도 민족자본과 민족기술로 운영한다는 대원칙을 고수하였다.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의 민족기업은 지배국의 후원이나 자본 및 기술의 결탁 없이는 존립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민족자본과 기술만으로 설립 · 운영이 가능했던 극소수의 민족기업체의 하나가 되었다. 직원채용에 있어서도 ‘조선인에 한함.’이라고 규제하였다.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으나, 당시 일본인 회사에서도 ‘일본인에 한함. ’이라고 하였으므로 총독부로서도 제재의 구실이 없었다.

창립 당시의 경영진은 사장에 박영효(朴泳孝), 전무에 박용희, 오늘날의 이사인 취체역에는 이강현 · 선우 전 · 윤상은 · 안종건 · 김성수, 감사역에는 장두현 · 이일우 · 장춘재 · 박승직 · 조설현 등이었다.

서울 영등포에 공장을 건설하고, 동력직기 114대로 조업을 시작했으며, 1923년에는 제품이 나왔다. 제품이 시장에 나왔을 때는 이미 일본제의 면제품들이 시장을 거의 독점하여 시장 개척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기존시장에 침투하여 시장쟁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호에 맞는 제품생산에 힘을 쏟았다. 곧, 세탁에 대한 내구력이 강하고 묵직한 중량의 제품을 개발해야 했다. 당시의 선전 광고문에는 “10차 이상 세탁해도 본질이 변하지 않고 내구력이 강하여 외래품을 능가함.”이라고 적고 있다. 그때 농촌에서는 가볍고 우미한 것보다는 둔중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표에도 ‘태극성’ · ‘농구’ · ‘불로초’ · ‘산삼’ · ‘삼신산’ · ‘천도(天桃)’ 등으로 우리의 것을 사용하였다. 일본 제품은 서울을 비롯한 경인 지방 및 부산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제품을 경기 이북, 특히 관서 및 관북 지방의 민족주의운동에 호소하여 시장을 개척하였다.

또, 1920년대 초부터 시작된 조선물산장려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여 ‘조선인은 조선인의 광목으로’라는 표어를 내걸고 국산품애용과 생산장려를 선전하면서 민족기업의 육성을 고취하였다.

초기에는 경영상 적자 운영을 면하지 못했으나, 1923년 김연수(金䄵洙)가 경영책임자로 취임하여 경영의 기술화를 단행하여 기업으로서의 틀을 갖추었다. 그 뒤 자본금을 증자하면서 영등포공장을 확장하고 직기도 증설했다.

1927년 본사사옥을 서울 을지로에서 광교의 현사옥으로 신축 이전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대규모기업으로 발전하여 일본인 방직업계와 경쟁하였다.

곧 자본금 1000만 원의 대기업체가 되었으며, 또한 남만주로 진출하여, 1939년에는 만주의 심양에서 자본금 1000만 원의 남만주방직회사를 설립하였다.

1945년의 영등포공장은 방적기 3만 200추, 직기 1,129대의 대규모의 근대식 면방적공장으로 성장하였다. 광복 이후 그 곳에서 많은 훈련을 쌓은 민족계 기술자들이 주동이 되어서 방직기업의 재건을 담당할 수 있었다.

광복과 더불어 6·25전쟁을 거치면서 관리부실과 일부시설 등의 파손으로 약간 침체되었으나, 그 가운데 영등포공장의 일부시설을 복구하여 경영활동을 영위하였다. 1956년 3월에는 주식을 상장하여 기업을 공개하였고, 1970년 3월에는 상호를 주식회사 경방으로 변경하였다. 그 뒤 시설을 확장하여 1973년 4월에는 생산시설 규모가 방기 6만 7700추, 직기 566대에 달하였다.

1977년 5월에는 경기도 용인에 제2공장을 완공하였고, 1984년 4월에는 염색기 12대 규모의 반월공장을 준공하였다. 1985년 10월에는 독일 함브르크사무소를 폐쇄하였고, 1987년 10월에는 광주에 방기 3만 1104추 규모의 최신예 방적공장을 준공하였다.

1990년 2월에는 ㈜경방어패럴에 투자하였고, 3월에는 부산공제공장을 폐쇄하였다. 1992년 7월에는 ㈜경방유통에 투자를 하였으며, 1994년 2월에는 ㈜한강종합유선방송(CATV)을 설립하였다.

현황

주요 사업은 면사 · 생사 · 화섬사 기타 각종 사의 제조 및 판매, 면직물 · 견직물 · 화섬직물 기타 각종 직물의 제조 · 판매 등이다. 주요 제품과 구성비율은 사류, 포류-경방 제품 30%, 경방 임대 30%, 사류, 포류-경방 상품 16% 등이다. 관계회사로는 중앙염색가공㈜ · 경방기계㈜ · 경방상사㈜ · 경방어패럴㈜ · ㈜경방유통 등이 있다.

2015년 현재 총자산은 1조 2595억 원, 자본금은 137억 원, 연간 매출액은 3077억 원이다. 본사는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영등포동4가에 있다. →경성직뉴주식회사

참고문헌

『經濟月報』(京城商工會議所)
『朝鮮物産奬勵會報』1∼10
『회사연감』(매일경제신문사, 1997)
『경방60년』(주식회사 경방, 1980)
『경성방직50년』(경성방직주식회사, 1969)
「삼일운동전후의 민족기업의 일유형」(조기준, 『삼일운동오십주년기념논집』, 동아일보사,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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