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 조직적인 경제단위이다. 기업을 하는 사람, 즉 기업가는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생산요소를 결합시켜서 새로운 부가가치를 가지는 재화와 용역을 생산한다. 기업은 개인이 영리 등을 목적으로 하여 운영하는 사기업과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운영하는 공기업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인 상인, 민법상의 조합과 상법상의 특수조합, 합명회사·합자회사·주식회사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은 주식회사 형태의 사기업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기업 회사가 설립된 시기는 1880년대 초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도 상인이나 수공업자가 타인의 자본을 도입하여 사업을 운영한 예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본의 차입(借入)이고, 차입한 돈에 대해서는 이자를 지불한 것에 불과했으므로, 타인자본과 합자하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사업체를 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개항 이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달되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한다. 1876년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했고, 1880년대 초에는 청나라 및 미국 · 영국 · 독일 · 이탈리아 · 프랑스 · 러시아 등 서구 여러 나라와도 통상조약을 맺었으며, 수도 한성에 외국공관이 상설되었다.
부산 · 인천 · 원산 등 국내 주요항구가 외국상인에게 개방되었고, 개항장 안에는 서구의 근대적 회사조직을 가진 수많은 일본상인과 청나라 상인이 진출하였다. 특히 인천항에는 영국 · 미국 · 독일 등 서구상인이 들어와서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개방체제에서 일본상인과 청나라 상인의 중개 무역에 의해 대량으로 서구의 근대 공장제 상품이 수입되었고, 이것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수공업제품에 비하여 양과 질이 월등히 앞서 국내 수공업제품을 밀어 내기 시작하였다.
한편, 외국상사들의 상업활동은 그 조직이나 운영면에서 우리나라의 전통상인을 압도하여 서양상인들과 통상하는 사이에 우리나라 상인들도 점차 서구식 상사의 조직과 상업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한양 및 인천 등 개항장의 상인들은 근대적인 기업회사의 설립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개항장에서 외국상인 및 외래상품의 상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우리나라의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었다. 객주와 여각은 17, 18세기 이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특권 시전(市廛)에 대항하면서 성장한 상인층이며, 그들은 서울의 한강과 지방의 각 포구에 자리잡고 도읍으로 운송되는 물화를 매점함으로써 재화를 축적하였다. 따라서, 객주와 여각은 봉건 상업질서를 무너뜨리면서 등장한 새로운 상인이며, 특권 시전인과는 달라서 근대 상업에 한걸음 접근하고 있었다 볼 수 있다.
개항 직후의 무역관계에서 객주와 여각의 활동은 컸다. 초기 무역에서 외국상인들은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에서 사방 10리를 넘는 지역은 행상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그들의 상거래는 개항장에 한정되고 있었다. 이 초기에 진출한 외국상인들은 언어도 통하지 않았고, 상거래 관습에도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그들은 부득이 개항장의 전통 상업망을 통하여 상품을 판매하고 물화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개항 초기의 무역관계에서 외래상품의 판매와 지방 물화의 수집을 담당하고 나선 것은 이문(利文)에 예민한 진취적인 객주와 여각이었다.
객주와 여각은 산하에 여러 명의 거간(居間) 및 군소상인과 보부상을 두고, 수입상품 판매와 수출품 수집에 종사함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개항 후 7∼8년간은 이와 같이 객주와 여각이 전통 상업망을 통하여 개항장에서 국제무역에 주요한 몫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무역관계가 점차 달라져 갔다. 1882년에 미국 및 청나라와 사이에 통상조약이 체결된 데 이어 서구 각국에도 문호를 개방했고, 개항장도 부산항 외에 새로이 인천 및 원산의 두 항구가 개항되었고, 한성개시(漢城開市)가 실현됨에 따라 외국상인의 진출도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특히 괄목할 만한 일은 일본상인과 청나라상인의 경쟁이 심해진 점이라고 하겠다. 일본상인과 청나라상인의 경쟁은 개항장에서뿐만 아니라 지방 소읍에까지 확장되어 민족상인의 이해와도 무관할 수 없게 되었다. 1883년의 한영통상조약을 계기로 외국상인들도 우리 나라 안 각지에서 상행위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방행상을 허용한 규정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용한 외국상인은 청나라상인과 일본상인이었다.
특히, 상리(商利)에 밝은 청나라상인은 객주와 여각을 상대로 무역하기보다는 직접 한국인 거간을 고용하고, 한국고객과 거래하는 한편, 지방 소읍에 진출하여 상품판매와 물화수집을 함으로써 더 많은 이윤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이 청나라상인이 사업망을 지방에까지 확장하자 일본상인도 곧 그 뒤를 따랐다. 민족상인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수입상품의 국내판매와 수출상품의 수집을 전담하고 있던 객주 · 여각 및 보부상은 청나라상인과 일본상인의 지방진출로 상권에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민족상인간에 상업을 조직화하고 사업방식을 혁신하여 외국상인에 대응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880년대 초부터 상사를 설립하는 등 민족상인계에 회사기업이 태동하게 된 것은 이러한 정세변화에 대응한 혁신운동의 결과였다. 외국상인의 진출로 말미암아 민족상인이 맞닥뜨리게 된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하여 상업계의 일각에서 태동한 상업의 조직화 및 사업방법의 혁신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일부 지도층인사들도 서구의 회사제도를 소개하면서 회사설립을 촉구하는 논설을 피력하였다.
그 중에서도 1882년에 유길준(兪吉濬)이 소개한 『회사규칙(會社規則)』과 1883년 『한성순보(漢城旬報)』 제3호에 게재된 「회사설(會社說)」은 서구의 회사제도를 우리 나라에 소개한 최초의 논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논설은 근대상업에서의 회사설립의 필요성과 조직 및 설립절차를 상세히 소개한 것으로, 개항 후 민족상인의 회사설립의 지침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1880년대 초부터 우리나라에서 ‘상사(商事)’ 혹은 ‘공사(公司)’ · ‘회사(會社)’ 등의 이름으로 새로운 상업조직이 출현하였다. 1880년대 초 국내에 설립된 상회사(商會社)에 관해, 1884년 4월 19일자 『한성순보』는 당시 한국 내에 설립되고 있는 회사로서 서울의 장통회사(長通會社) 등 16사(社), 인천의 공흥상회(共興商會) 등 6사, 부산의 해산회사(海産會社) 등 6사, 합계 28사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초기에 설립된 회사들은 대부분이 근대적 주식회사 조직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다. 명칭도 회사 · 상사 혹은 ‘국(局)’이고, 조직도 개인상회에 불과한 것이 많았다. 또, 명칭은 분명히 회사이나 조직과 기능으로 보면 동직자조합(同職者組合)의 성격을 가진 것도 있었다.
인천의 신상회사(紳商會社) 및 부산의 균평회사(均平會社:客主商業會社) 등은 그 예로서, 회사라기보다는 상인조합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하지만 초기의 상사회사 중에 그 이름에 부합하는 근대 주식회사 조직을 가진 것이 적었다 하더라도, 개항 후 수년 동안에 민족상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회사 및 상회의소(商會議所)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상인들의 의식이 근대지향적으로 바뀌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민족자본의 기업활동은 18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비단 상사회사뿐만 아니라 산업의 각 부문에 걸쳐 근대기업회사가 설립된다. 즉, 근대 금융기관인 은행의 설립이 성행하며, 운수 · 광업 · 제조업 부문에서도 각종 기업회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이후 19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민족회사의 설립실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립의 필요성은 이미 일찍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갑오경장 이후 그 운동이 구체화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이 1896년에 안경수(安駉壽) · 김종한(金宗漢) · 심상훈(沈相薰) 등의 발기로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한흥은행(韓興銀行) · 제국은행 · 한성은행 ·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 한일은행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으나, 한말의 정계가 불안한 가운데 자금의 뒷받침이 튼튼하지 못하여 그 중 일부는 개점 수년 후에 폐업되고, 한성은행 · 대한천일은행 · 한일은행만이 존속할 수 있었다. 이 민족은행의 설립에는 귀족의 토지자본과 거상들의 상업자본이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철도와 광산은 한말에 열강들이 서로 다투어 개발권을 얻고자 한 이권이었고, 따라서 뜻있는 민족기업가들은 이것만은 민족의 힘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철도는 거액의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므로, 민족기업가들은 뜻은 있어도 손쉽게 착수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우리나라 철도업의 선구자는 부산 경무관을 지낸 박기종(朴琪淙)이었다. 그는 1898년에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하고 부산과 하단(下端) 간의 철도부설을 기도했으며, 1899년에는 대한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과 의주 간의 철도건설, 1902년에는 삼마철도(三馬鐵道) 건설을 기도했다. 그의 계획은 자금부족과 일제의 방해로 완성을 하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운동은 우리 정부와 민족기업에 큰 경종이 되었다.
기선업(汽船業)에서 우리나라의 해운권은 개항 후 진출한 일본의 거대 상선회사인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와 대판상선주식회사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민족기업가들은 이 독점운수가 민족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여 자본을 모집하고 외국선박을 구입하여 약탈당한 운수권을 회복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00년 7월에는 안영기(安永基)의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가 설립되고, 같은 해에 이윤용(李允用) · 이영균(李泳均) 등의 인천우선회사(仁川郵船會社), 이재극(李載克) · 민영철(閔泳喆) 등의 인한윤선주식회사(仁漢輪船株式會社) 등이 설립되었으며, 1903년에는 김일진(金一鎭)의 의령상선회사(宜寧商船會社)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본이 들어 가는 기선업에 민족자본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 밖의 운수업도 해상운수권을 일본에 약탈당한 민족기업가들은 비교적 소자본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육운업(陸運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897년에는 안경수 · 김기영 · 백완혁(白完爀) 등의 발의로 마차회사(馬車會社)를 설립, 인천∼서울 간의 운송을 담당했다.
또, 1899년에는 조의연(趙義淵) · 민영준(閔泳駿) · 조병하(趙秉夏) 등이 주동이 되어, 연안운송을 목적으로 이운사(利運社)를 조직하였다. 그 밖에 1901년에는 통운사(通運社), 1903년에는 통동회사(通同會社) 및 종선회사(從船會社), 1906년에는 창성사(昌盛社) 등이 설립되었다. 또, 철도용달회사로는 1899년에 박기종 · 이규환(李圭桓) 등의 철도용달회사, 1900년에 김기락(金基洛) 등의 경부철도역부회사(京釜鐵道役夫會社) 등이 설립되었다.
제조업 중에서 민간기업인이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역시 방직공업이었다. 개항 후 대량으로 수입된 상품은 면사 및 면직물이었고, 또 그것은 대중수요품으로서 판로도 날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국내 민간기업인은 대표적인 방직공장으로서 대한직조공장 · 저마제사회사(苧麻製絲會社) · 종로직조사(鐘路織造社) · 김덕창직조공장(金德昌織造工場) · 한영서원실업장(韓英書院實業場) 등을 설립하였다. 그 중에서 안경수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대한직조공장과 저마제사회사는 당시 국내정세의 변동 및 자본부족 등으로, 생산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종로직조사는 종로백목전(鐘路白木廛)이 주동이 되어 1899년에 건립한 것이며, 초대 사장에는 민병석(閔丙奭), 부사장에는 이근호(李根澔)가 취임하였다.
김덕창 직조공장의 김덕창은 전래의 기업가 출신이었고, 그는 일찍부터 소규모의 가내공업을 경영하였으며, 근대적 공업제품이 다량 수입되자 서구식 기계를 도입하여 공장공업으로 발전시켰다. 한영서원실업장은 1904년 윤치호(尹致昊)에 의해 한영서원이 설립됨과 동시에 학생들의 실습장으로서 직조공장을 병설한 것인데, 제품의 품질이 우수해서 호평을 받게 되었으므로, 주식회사송고실업장(株式會社松高實業場)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한말의 방직공장은 자본에서나 기술에서, 모두가 영세공업이었고, 수공업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직공장 이외의 각종 공업 부문에서도 근대공업 건립의 노력은 볼 수 있으나, 그 사정은 이와 비슷하였다.
광업 부문은 1900년에 한석진(韓錫振)이 해서철광회사(海西鐵鑛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에 김각현(金珏鉉) · 하긍일(河肯一) 등의 강원도매광합자회사(江原道煤鑛合資會社) · 흡통매광합자회사(歙通煤鑛合資會社) · 해서철광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부문의 회사들은 자본 및 기술 부족으로 본격적인 채굴은 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도 물론 상사회사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 중 중요한 회사는 양군실(楊君實)이 1895년에 설립한 마포미상회사(麻浦米商會社), 1900년에 이백술(李伯述)이 설립한 석유목면회사(石油木綿會社) · 이원오종회사(利原五種會社), 이근호 · 민소식(閔素植)의 광신교역회사(廣信交易會社), 강인규(姜寅圭)의 협상회사(協商會社), 김지선(金止善)의 광성천일흥업회사(鑛城天一興業會社)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농수산업 부문에서는 채과회사(菜果會社) · 상물회사(翔物會社) · 남초회사(南草會社) · 만삼광화회사(蔓蔘廣化會社) · 종삼회사(種蔘會社) · 양잠회사(養蠶會社) · 해산회사(海産會社) 등이 있고, 제조업 부문에는 안경수 · 이재형(李在衡) 등의 저마제사회사, 이흥우(李興宇)의 구성수철회사(九成水鐵會社) · 대한제국인공양잠합자회사(大韓帝國人工養蠶合資會社) 등이 있다.
기타 산업 부문에는 1903년에 설립된 한성전기주식회사, 최석조(崔錫肇)의 신석연초합명회사(信錫煙草合名會社), 이재순(李載純)이 설립한 청축회사(請築會社), 이근택(李根澤)의 전권회사(典卷會社), 김재정(金在政)의 흥업회사(興業會社) · 한창회사(漢昌會社)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갑오개혁 이후 민족자본의 회사설립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며, 그것은 비단 상사회사뿐만 아니라 각종 산업 분야에서 근대 기업회사가 설립된다. 이 시기의 회사들은 초기 개화기의 회사와 같은 특권회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회사설립에서 일반 서민 출신의 기업가는 귀족 또는 관료 출신의 기업가와 합작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일종의 특권을 기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금면 또는 회사설립 및 운영면에서 더 손쉬운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본과 청나라 및 서구열강에 대항하며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한말의 근대기업들은 1905년의 금융공황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개항 이후 민족자본가들은 개화의 물결에 발맞추어 서구 자본주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 들여, 1890년대부터는 서로 다투어 기업을 창립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이러한 시기에 뜻밖에 몰아 닥친 금융공황은 민족자본의 성장에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금융공황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인 재정고문인 메카타(目賀田種太郎)에 의해 단행된 화폐개혁에 있었다.
메카타는 1904년 9월 우리나라에 부임한 뒤 우리나라의 경제적 실태와 관습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폐 정리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구상한 이 「신화폐조례(新貨幣條例)」는 1905년 1월에 발표되었고, 이것이 직접 원인이 되어 그 해 여름에 대금융공황이 일어났다. 화폐개혁 때문에 일어난 금융공황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민족계 기업인들이었고,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상인들은 별로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1905년의 화폐개혁은 우리의 토착자본을 몰락시켰고, 우리의 토착자본을 일본자본에 예속시키는 역사적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병합된 뒤 일본은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두 가지 중요한 법령을 발표, 실시하게 하였다. 그 하나는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이다. 「토지조사령」은 우리나라의 토지와 농민 및 농업정책을, 그리고 「조선회사령」은 우리나라의 상공업정책을 집약한 것이다.
「토지조사령」에 따른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은, 첫째로 전국의 토지 및 산림의 정확한 면적을 파악하여 재정정책의 기초로 삼자는 것이다. 둘째는 소유권이 분명하지 않은 것을 구실삼아 국유지의 대량 잉출(剩出)을 감행하여, 이를 총독부 재산에 편입시켜 시정재원(施政財源)으로 하고, 또 일본인 농업회사의 진출을 방조하자는 것이었다. 셋째로는 조선인의 양반 · 귀족을 지주로 인정하고 예로부터 내려 온 소작제도를 유지시킴으로써, 총독정치의 협력자로 포섭하자는 의도였다.
1910년 12월에 공포하고 이듬해 1월부터 발효한 「조선회사령」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원료생산지와 상품시장으로 육성한다는 고전적인 식민지이론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조선회사령」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회사설립 및 우리 나라 밖에서 설립된 회사가 우리나라에 지점을 설치하고자 할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의 회사설립에 허가주의를 채택한 것이며, 일본 정부의 조선정책에 따라 우리나라에서의 근대공업건설을 견제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편, 총독부는 병합 후 일본 경제인의 조선진출을 위해 본격적인 건설에 착수하였다. 본격화된 기초 시설 건설을 위한 재원은, 조선총독부가 조세부담의 가중과 토지조사사업에서 잉출된 국유지불하대금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 · 식산은행(殖産銀行) 등 국책은행을 설립하여 우리나라의 금융실권을 장악했고,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조선우선주식회사 등 거대한 국책회사를 설립하여, 우리나라의 중요 경제 분야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그러한 소수의 국책회사가 설립된 이외에는 민간회사의 신규설립은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일본이 「조선회사령」을 공포하여, 우리나라에는 근대공업 특히 일본 국내공업과 경쟁이 되는 공업을 억제하려고 한 정책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식민지 초기의 경제정책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계기로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경제는 제1차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의 전쟁수요와 교전국이 이미 장악하고 있던 시장의 공백을 메우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나, 종전과 더불어 대외무역의 격감과 함께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제1차세계대전 후의 대외무역 부진과 더불어 전시중에 과잉투자했던 일본공업이 불황에 접어 들자, 한편으로는 자본의 집중화가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의 해외진출이 시도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착안한 것이 우리 나라였다. 또 대전중 일본공업의 비약적 발전과는 반비례하여 일본 농업생산력은 저하되었고, 일본의 미곡생산은 수요를 따르지 못하여, 우리나라와 대만의 쌀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쌀값 폭등으로 1918년에는 드디어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일본은 그때부터 우리나라의 미곡증산정책을 본격화하였다.
조선통치정책을 전환시킨 또 하나의 원인은 민족항거운동이었다. 1919년 3월 일제에 항거하는 거족적 운동이 있은 뒤, 일제는 총독을 교체하였고, 무단정치에서 소위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문화정치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미곡증산과 국민교육의 확충으로 표현된 농촌진흥정책과 기업활동의 제한을 완화하는 정책으로 표현된 공업화정책이었다. 이것은 대전 후 불황에 직면한 일본 자본주의의 요청과도 부합하는 정책이었다.
산미증식정책은 일본의 식량난을 해소해 줄 것이고, 국민교육 확충은 농촌시장의 개발을 기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기업활동의 완화는 일본의 유휴자본이 진출할 길을 터 주었다.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책은 착취를 위한 근대화정책이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경제의 전개는 제2단계를 맞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기업의 활동을 살펴보면, 일본의 국권침탈 후 우리 기업활동은 지방으로 확산되고 지방 출신의 기업인이 등장하며, 근대 서구식 교육을 받은 기업인이 출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기업인이 발생, 성장하였는데, 그들의 대부분은 지방 출신이었고, 또 기업활동도 지방을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한말에 일찍이 개화사상에 눈뜨고 식산흥업(殖産興業)을 주장하면서 근대기업 창설을 주도해 오던 관료 및 귀족계층 대부분은 을사조약 후, 점차 침략세력과 영합하면서 식민지화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나섰다. 국권침탈 후 이러한 성향의 구관료 및 귀족의 자본은 일본인 자본과 합작하여 기업을 창립하거나, 또는 일본인 기업에 투자함으로써, 안전한 자본증식을 꾀하였다.
그 구관료 및 귀족들은 1910년대의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더욱 큰 대토지 소유자로 등장하고 각종 농림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봉건 소작지대에 기식(寄食)하는 전근대적 경제의식과 행태를 탈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국권침탈 후 지방의 대지주 · 상인 및 서민 출신이 점차 근대기업계에 진출하면서 일제강점기 동안 민족기업의 새 주역으로 등장한다.
지방의 대지주 및 거상들은 지방은행 설립과 지방에 근거를 둔 근대기업을 건설하면서, 한말의 관료 및 귀족을 대신하여 민족지도자로서 1920년대의 계몽운동을 선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족의 자립을 새 시대의 지도이념으로 내세우면서, 민족주의가 근대기업 창립의 동기와 목적임을 강조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민중들이 그들을 민족의 지도자로서, 또는 민족기업가로서 성원한 것은 근대기업 창립의 동기와 목적이 민족주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3 · 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계층에서 근대기업활동이 시작되었다. 지방의 소지주 · 소상인 및 서민계층의 기업계 진출이 그것이다. 그들은 식민지 통치에서는 몰락의 길을 밟아야 하는 사회계층으로서, 새로운 생활 터전을 기업활동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수는 점차 증대하여 1920년대 민족기업 활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의 힘밖에 믿을 것이 없었으므로, 근면과 노력과 성실로써 생활을 개척하는 시민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소자본으로 중소기업을 일으키고 육성해 나가는 데서 생의 보람을 느꼈던 것이다. 국권침탈 후 지방의 대지주들이 우선 착안한 것은 지방은행의 설립이었다.
광무 연간에 근대 금융기관이 민족자본으로 설립되었으나 모두가 한성에서 개점했고, 을사조약 이후 농공은행(農工銀行) 및 지방 금융조합이 설립되었으나, 그것은 일본 통감부가 금융통제를 목적으로 설립을 강요한 것이었으므로, 그러한 금융기관은 민족계 기업인의 활동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지방의 지주 및 상인들은 지방의 민족계 기업인의 금융을 담당하는 은행을 자기들의 힘으로 설립하고자 했다.
구포저축주식회사(龜浦貯蓄株式會社)는 그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민족계 지방금융기관이었다. 이 회사는 1908년에 구포의 대지주 윤상은(尹相殷)이 일가의 지주자본과 역시 구포에서 미곡상으로 거부가 된 장우석(張禹錫)이 주동이 되어 설립하였다. 당초에는 저축업무만 취급했으나, 뒤에 이 회사가 모체가 되어 1912년에 일반 은행으로 개편되어 구포은행으로 발전하였다.
이 구포은행에 이어 1913년에는 호서은행(湖西銀行)과 대구은행(大邱銀行)이 설립되었다. 호서은행은 충청남도의 대지주 이기승(李基升) · 성낙규(成樂圭) 등이, 그 고장 출신으로 일찍이 서울 상업계에 진출한 김진섭(金鎭燮) 등과 합자하여 설립한 것이다. 또한 대구은행은 경상북도의 대지주 정재학(鄭在學) · 최준(崔俊) · 이일우(李一雨) 등의 발기인 이외에 대구지방의 상인자본을 끌어 들여 설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라의 병합 직후에 일제는 헌병정치로 민족의 재기를 억압하고 민족자본의 활동을 극도로 억제하였으므로, 그 시기에는 이상의 소수 지방은행이 설립되었을 뿐 그 밖의 활발한 기업활동은 없었다. 지방지주들의 기업활동이 다시 활기를 띠는 것은 3 · 1운동을 전후하는 시기부터였다. 일본자본도 병합 후 각 지방의 소읍까지 진출하여, 지방 주요 도읍에 일본인 금융기관을 신설함에 따라, 당시 지방의 유지라고 할 수 있는 지주 및 상인들이 일제의 경제침탈에 대항하면서 민족자본의 육성을 목표로 지방 각 도읍에서 민족계 은행설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상남도지방에서는 1918년 6월에 김홍조(金弘祚) · 최연국(崔演國) · 김석준(金錫準) 등의 발기로 부산 초량에 주일은행(主一銀行)이 설립되고, 같은 해 8월에는 윤병준(尹炳準) · 추종엽(秋鍾燁)이 동래은행(東萊銀行)을 설립하였다. 이 주일은행은 그 해 12월에 구포은행의 후신인 경남은행에 병합되고, 동래은행은 1933년 호남은행에 흡수되었다.
경상북도지방에서는 장길상(張吉相) · 장직상(張稷相) 형제가 1920년에 대구에 경일은행(慶一銀行)을 설립하였다. 호남지방에서는 1920년 8월에 영암 대지주이며 목포창고금융주식회사(木浦倉庫金融株式會社)를 설립한 바 있는 현기봉(玄基奉)과 그의 아들인 현준호(玄俊鎬)가 일본유학에서 돌아와, 목포의 거상 김상섭(金商燮)과 합자하여 호남은행을 창립하고, 광주의 본점과 목포의 지점을 동시에 개점하였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지방에서는 1919년에 박기순(朴基順) · 김영철(金永哲) · 신태빈(辛泰斌) 등이 발기하여 전주에 삼남은행(三南銀行)을 설립했다. 서울 이북지방에서는 1920년 3월에 이진태(李鎭泰) · 이춘섭(李春燮) 등의 발기로 평양은행이 설립되고, 함흥에서는 김승환(金昇煥) 등이 1918년 6월에 북선상업은행(北鮮商業銀行)을 설립하였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지방의 대지주 및 상인자본의 활동은 비단 은행설립만이 아니라, 각종 산업 부문에서 근대기업활동을 전개하였다. 3 · 1운동 전후에 근대기업계에서 활동하는 지방의 대지주 및 상인의 기업의식과 행태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기업으로서 경성방직주식회사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1919년에 김성수(金性洙) 외 군소 주주 182명의 참여로 설립, 군소 주주가 전체 주식의 62.9%를 차지하고 있어, 명실공히 민족의 기업으로 출발하였다. 이 회사의 기술담당은 이강현(李康賢)이 맡았고, 경영은 김연수(金秊洙)가 담당하였다. 이 회사는 일본인 자본이나 일본인 기술자는 일체 받아 들이지 않고 전적으로 민족의 자본과 기술로 설립, 운영하였다.
1920년대 민족계 기업인의 활동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소농민 및 소상인, 그리고 일반 서민 출신의 기업인이 대량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우선 기업회사의 설립면에서 볼 수 있다. 1920년 말 한국인 회사는 99개 사였으나, 1929년에는 207개 사로서 그 동안 약 2배의 증가를 나타내었다. 같은 기간에 일본인 회사는 414개 사에서 472개 사로, 회사증가 수는 58개 사에 불과했다. 한국인의 기업계진출은 이 기간에 일본인의 활동보다 크게 신장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 기업회사의 자본금은 1920년에는 한 회사당 평균자본금이 19만 4천여 원이었으나, 1929년에는 9만 5천여원으로서, 한 회사당 평균자본금이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또, 1929년 말 한국인 회사 207개 사 중에는 자본금 50만 원 이상의 회사가 24개 사나 되었으나, 그 밖의 회사의 평균자본금은 더 낮았다. 이 통계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1920년 이전에는 한 회사당 자본액이 비교적 큰 기업회사가 설립되었고, 따라서 자산가들이 근대기업에 많이 진출했다고 하겠으나, 3 · 1운동 이후의 민족기업활동에서는 군소자본이 우세하며, 서민 출신 기업인의 근대기업계 진출이 현저하게 증가했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 민족계 기업인이 활동한 분야는 금융업을 포함한 상업 부문이었고, 다음은 운수업이었다. 지방의 대지주 및 상인들은 전술한 바와 같이 지방은행의 설립과 무역업에 다수 진출하나, 서민 출신의 기업인들은 지방의 군소상업계에서 활동하였고, 운수업 부문에서는 선박 · 화물자동차로 하는 작은 규모의 운송 부문에서 생활을 개척해 나갔다.
1931년에 일본의 만주침략과 더불어 일본 자본주의는 외곽지대로 급진적으로 확대해 갔고, 그 결과 우리나라의 공업화도 이 시기에 크게 진전되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일본자본이 우리나라에 적극적으로 진출하는데, 이 시기에는 비단 군소자본뿐만 아니라 독점자본이 우리나라에 진출하여, 근대공업 성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데 특색이 있다.
이와 같이 이 시기에 들어와서 일본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이유는 당시 일본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와 상태가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이다. 1927년 이후로 일본 산업계는 이미 불황상태에 직면했고, 특히 1929년의 세계공황에 일본경제도 휩쓸려 들어 갔다. 그와 같은 사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일본 산업계는 한편으로는 기업의 합리적 운영을 꾀하고 조업단축을 단행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각 기업체 간에 협동체를 결성하여 자체 내의 통제를 감행하였고, 유휴자본의 해외진출을 꾀하였다.
이상과 같이, 일본 산업계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각 기업은 조업단축, 생산 및 판매 협정으로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또, 그와 같은 통제조직은 대기업이 중심이 되면서 점차 독점을 강화해 나갔고, 중소기업은 몰락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 국내에서 몰락한 중소기업은 당시 통제권 밖에 있던 우리나라에 진출하였고, 또 큰 기업체도 조업단축으로 발생한 유휴자본을 우리나라에 투입하였다.
1931년에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지방을 완전히 수중에 넣자, 대륙 전진기지로서 조선의 공업화를 더욱 절실하게 요망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공업화는 이 만주침략 이후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공업화가 정책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민족계 기업의 활동에 대한 억제도 다소 완화되어, 1930년대 전반기에는 한국인의 기업계 진출도 과거 어느 시기보다 활발해졌다. 또, 이것은 한편으로는 한국인의 경제의식이 높아진 결과이기도 했다.
1938년 말 우리나라의 회사 총수는 5,413개 사였고, 그 가운데 한국인 회사 수는 2,278개 사로서 전체의 42%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1929년 말 한국인 회사 수의 비율 20.5%에 비하면, 그 동안의 증가는 괄목할 만하다고 할 수 있다. 자본면에서도 같은 기간에 민족회사가 차지하는 비율은 6.3%에서 11%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민족기업의 성장은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일부의 대규모 기업을 제외하고는 영세자본의 회사가 증가한 결과라고 하겠다. 이러한 실정은 같은 시기의 일본인 회사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1938년 말 우리나라의 일본인 소유 회사의 한 회사당 평균자본금은 30만5천여 원이었으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인 소유 회사는 5만3천여 원으로서 자본금 규모에서 보면 6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즉, 한국인의 기업활동은 1930년대 전반기에 와서는 조선의 공업화정책의 여파로 크게 신장했다고 하겠으나, 이 시기에도 역시 한국인의 기업활동은 영세자본에 의한 중소기업 분야에서 활로를 개척해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일본이 중국본토에 대한 침략전쟁을 감행하고, 이 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됨에 따라, 일본의 전시 경제체제는 더욱 강화되었고, 기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1940년대에 접어 들어 전세가 불리해지면서부터, 조선총독부는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여기에 통합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1942년에 발포된 「중소기업정리령(中小企業整理令)」은 특히 한국인 기업체가 정리대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기업의 몰락이 현저하게 나타났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되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광복을 찾았으나, 당시의 정치 및 경제적 실태는 국민국가 건설에 유리한 여건이 되지 못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국민이 바라는 통일정부가 즉시 수립될 수 없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일제가 남기고 간 경제적 유산이 국민경제 건설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미국군이 남한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게 되었으며, 미군정은 일제가 실시해 오던 경제통제를 모두 해제하고 자유경제체제를 채택한다고 발표하였다. 경제자유화정책은 일시적으로 시장경기를 가열시켰으나, 생산활동이 마비되어 새로운 제품의 공급이 단절된 상황에서 시장경기의 호황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생산활동이 마비되고 생활필수품의 품귀현상이 심화되어, 그것을 타개하는 긴급대책은 해외에서 물자를 도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초기에는 무역이 제대로 행해질 수 없었으므로 무허가 사무역이라고 속칭되는 밀무역(密貿易)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또, 우리가 생활을 지탱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의 원조로서, 미군정 3년간 미국에서 약 4억 634만여 달러의 무상원조를 받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한미경제원조협정」을 체결하였고, 이듬해에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 실시하였으며, 「농지개혁법」을 제정, 공포하여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경제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미군정 3년간 들떠 있던 한국경제와 국민생활은 정부수립 후 점차 안정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정계와 사회가 안정됨에 따라 국내 생산활동도 재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외무역을 위한 수출품으로서 광복 직후에는 일본인 회사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잡다한 물품이 이미 바닥났으므로, 새로운 수출품이 개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중석(重石)과 고령토(高嶺土) 등 광물이었고, 국제시장에서 한천(寒天)에 대한 수요가 증대하면서 수산업자들은 한천가공에 열을 올렸다.
광복 후 비교적 일찍 재건된 공장공업으로는 면방직공업을 포함한 삼백산업(면, 설탕, 밀가루)을 들 수 있다. 면방직공업은 정부 수립 후 정부의 특별 지원을 얻어 시설을 개선하여, 6 · 25전쟁 직전에는 광복 당시의 생산수준을 능가할 수 있었다. 또, 면방직 외에 동력원(動力源)과 광산 분야도 건설이 촉진되었다.
전력은 1948년 북한의 송전단절로 전력공급에 큰 어려움이 있던 터였으므로, 정부는 화력발전소의 증설을 기도하여 1949년 말에는 총 27만 2,825㎾의 전력을 개발하였고, 석탄도 정부의 적극적인 증산정책으로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광업 분야에서는 수출과 관련하여 정부와 민간의 노력으로 중석과 흑연생산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정부는 건국 초부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있었으나, 국민의 의욕적인 참여와 미국의 원조를 얻어 각 분야에서 경제를 재건해 나갔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2년도 되지 못해 6 · 25전쟁이 일어나서, 광복 후 점차 안정되어 가던 경제는 다시 대혼란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3년간의 전쟁으로 신생 한국이 안은 피해는 막대하였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 피해를 본 공업시설은 생산시설 42%, 공장건물 44%였다. 또, 전비 조달을 위한 막대한 재정지출은 인플레이션을 격화시켜서, 그 뒤의 경제재건에 큰 장애가 되었다.
그러나 1952년에 접어 들어 전세는 교착상태로 들어섰고, 휴전설이 대두되면서부터 전재 복구작업이 계획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후 23억여 달러의 외국원조와 국채 · 채권 등 인플레이션 요인을 내포한 내자지원에 힘입어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특히 공업화를 지향하면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1954∼1960년의 한국경제는 연평균 4.7%의 성장률을 보였고, 특히 공업 분야는 연평균 12.2%라는 높은 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휴전 후 전쟁 피해를 복구하고 급격히 성장한 공업은 섬유공업 분야였다. 이 공업 분야에서는 면방직 및 모방직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일론직물 등 신제품 생산시설도 도입되어, 1957년에는 이미 국내수요를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섬유공업 다음으로 활발한 투자가 이루어진 분야는 화학공업이었다. 화학공업 분야에서는 충주비료 · 나주비료 등의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었고, 시멘트공장이 삼척공장의 보수와 더불어 문경에 새로 건립되었다.
제지 및 고무공장도 이 기간에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제지공업은 새로운 시설을 도입함으로써 수입에만 의존하던 신문용지 등을 전량 자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무공업도 새로운 시설을 도입, 확충함으로써 고무신 생산 중심에서 자동차타이어와 고무 호스 등 신종 산업자재 생산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유리공업 부문에서는 1953년에 국제연합한국부흥위원단(UNKRA) 자금에 의하여 인천에 판유리공장을 건설하여 유리공업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이 밖에 합성수지 · 화약 · 가성소다 및 일반 화공약품 등 신규제품도 이 기간에 건설 · 공급되어 공업의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1950년대 후반기에 가장 성행한 공업 분야로는 제당 · 제분업을 들 수 있다. 제당업은 1958년 이래 급속히 발달해서 7개 공장이 경합, 건설되어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생산 과잉현상을 나타냈고, 제분업은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원맥 도입에 자극받아 각 업자간에 시설확대를 단행하다 보니, 역시 시설 과잉현상이 나타나 원맥 확보를 위한 암투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국민생활에 필요한 소비재공업은 급속히 발전을 이루었으나, 제철 · 제강업 및 기계공업 분야는 이렇다 할 발전을 하지 못하여 낙후성을 면할 수 없었다.
1961년 5 · 16군사정변으로 세워진 군사정권은 1963년 말까지 약 3년에 걸친 군사정부 통치를 거쳐, 1963년 말 총선거를 통해 민주공화당 정권으로 이어졌다. 5 · 16군사정변 후 군사정부는 통치의 기본 방향을 정치 · 경제의 질서 혁신을 확립하는 데 두었으며, 이에 따라 경제적인 면에서는 구정권과 결탁하여 구축된 경제세력을 거세하고, 새로운 양심적인 경제세력을 육성하여 나간다는 것이었다.
군사정부 및 공화당 정권이 추진한 경제정책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력이 필요하였고, 따라서 정치면에서는 자유민주체제를 어느 정도 규제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경제활동에 대해서는 건설의 방향, 투자의 우선순위의 결정, 자원배분 등을 통한 규제가 강화됨으로써, 정부주도형의 개발전략이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공화당 정권의 개발정책은 혼합경제체제로 특징지어지는 것이다. 즉, 정부가 주요 경제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국민경제가 운영될 수 있도록, 정부는 금융 · 재정 및 조세 지원 등의 정책수단을 동원하여 경제 전체에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이러한 경제운영의 기본 방향에 따라 군사정부는 1962년부터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실시하였다. 1962년부터 실시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1950년대의 한국경제 재건기와 비교할 때, 획기적인 정책전환을 단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성과는 정부가 추구한 성장목표 달성이란 측면에서는 일단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네 차례의 개발계획 기간중 국민총생산 성장률은 연평균 9.3%로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나타내었으며, 수출신장률 또한 연평균 39.9%라는 급속한 양적 확대를 보였다. 경제 성장면에서는 2차산업 부문이 1962∼1978년 기간중 연평균 19.1%의 성장률을 나타냈으며, 1979∼1980년에는 7% 정도의 성장률을 나타내었다.
그 다음이 3차산업 부문이고, 농업을 포함하는 1차산업 부문은 같은 기간중 연평균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2차산업 부문의 성장추세는 산업구조를 고도화해서 1960년의 산업구조, 즉 1차 · 2차 · 3차산업의 국민총생산 비중이 35.2:19.2:45.6이었던 것이 1978년에는 비율이 18.1:33.1:48.8, 1985년에는 13.8:29.6:56.6의 비율로 나타나, 농업 등의 1차산업 부문의 비중이 감소하고, 2차산업 부문이 급격히 증대한 산업구조의 고도화가 나타난다.
이렇게 볼 때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은 주로 공업 부문 성장정책에 의하여 주도되었다는 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2차산업의 높은 성장률은 정부의 집중투자, 조세 · 금융지원 정책 등 정부의 공업화정책의 결과이다. 즉,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으로 점차 산업구조의 고도화도 달성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국민소득의 증대와 고용증대라는 국민경제의 확대재생산을 낳았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 기간에 설립된 기업의 실태를 산업별로 보면 제조업 부문의 성장이 가장 두드러졌다. 제조업 부문의 사업체 수와 종업원 수는 1966년의 2만 2,718개 소와 56만 6,665명에서 1970년에는 2만 4,114개 소와 86만 1,041명, 1978년에는 2만 4,957개 소와 171만 7,308명, 그리고 1980년에는 3만 823개 소와 201만 4,701명, 1983년에는 3만 9,243개 소와 221만 5,233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로써 양적인 면에서나 규모면에서 모두 급격히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제조업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아도 1960년의 8.3%에서 1971년에는 19.6%, 다시 1978년에는 31.6%, 1984년에 30.4%로 증가하고 있어, 공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조업 부문의 눈부신 성장은 수출 위주의 공업화정책이 가져온 결과로, 정부는 경제계획 기간 동안 수출공업에 대해 집중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아울러 대단위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그에 대해 세제 및 금융면에서 여러 가지 특혜를 주어 공업화정책을 강행하였다.
또, 정부는 1960년대 경공업 중심의 수출산업 육성정책에서 1970년대에는 수출의 선도산업으로서 중화학공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즉, 1972년부터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실시되었는 바, 정부는 계획의 주축을 수출의 획기적 증대 및 중화학공업의 건설에 두고,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체제로 이행하였다.
이리하여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업정책의 뼈대를 중화학공업 건설을 통한 공업화정책에 두고, 6개 전략산업을 선정하여 집중 육성하는 데에 힘썼다. 6개 전략산업은 철강공업 · 비철금속공업 · 조선공업 · 기계공업 · 전자공업 및 화학공업이었다. 철강의 자급화와 다양화를 목적으로 설립한 포항종합제철은 1973년에 제1공장을 완공한 데 이어 이 기간에 확장공사를 단행하여, 1979년까지 제철 526만7천 M/T, 제강 862만5천 M/T, 압연 935만3천 M/T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비철강공업에서는 중화학공업의 소재공업 개발을 목적으로 동제련(銅製鍊) · 연(鉛) · 알루미늄 공장 등을 건설하였다. 조선공업에서는 국내수요와 수출을 목적으로, 대형 조선소 5개 소, 중형 조선소 2개 소, 원양어선 조선소 2개 소를 건설하였다. 전자공업 부문에서는 구미공업단지를 건설하고, 1981년까지 11억 9천여만 달러를 투자하여 25억 달러의 전자제품 수출을 계획하였다. 화학공업 부문에서는 울산 석유화학 공업단지를 국제 규모로 확장함과 동시에 여수에 종합 화학단지를 건설, 석유화학 계열공업을 육성하도록 하였다.
자본 규모면에서 이 기간의 기업실태를 보면, 1960년대 이후 재벌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이 급속히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기업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정부 주도형 경제정책 아래 정부의 지원이 대기업에 편중되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1960년대 이후 수입대체 산업에서 전진하여 수출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한다는 방침 아래, 수출 지원체제를 다져 나갔으며 이를 위해 금융 · 세제면에서 수출산업에 대해 집중적인 특혜를 주었고, 수출을 통해 이와 같은 특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기업이었다. 대기업의 성장이 현저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업을 거느리는 대규모 재벌의 성장이 특기할 만하였다.
1983년 당시 삼성 · 현대 · 대우그룹의 경우를 보면, 삼성그룹은 삼성물산을 비롯하여 24개 기업을 포함하고 있었고,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등 23개 기업, 대우그룹은 대우조선을 비롯하여 28개 기업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밖에도 그 당시 쌍용그룹(1997년 외환위기로 해체) · 럭키금성그룹(지금의 LG그룹) 등이 모두 20여 개 이상의 많은 기업을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정부의 적극적 지원 아래 수출공업으로서, 1960년대에는 합판공업 · 섬유공업 · 신발류공업 등 경공업이 급격히 성장하였고, 1970년대에는 전자공업 · 자동차공업 · 조선공업 및 화학공업 등 중공업 부문이 크게 발전하였다. 전자공업의 경우, 텔레비전 · 냉장고 등 가전제품 중심의 생산기술에서 진일보하여, 1980년대에 들어서서는 반도체산업에 적극 뛰어들어 컴퓨터 등 고도의 기술집약적 상품 생산에 몰두하였다. 자동차공업은 수출산업으로서뿐만 아니라 국내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1980년대 초반의 업체 통폐합과정을 겪으면서, 현대자동차 · 대우자동차 · 기아산업 등이 집중적으로 투자에 나섰으며, 조선공업도 거제도에 대단위 조선공업단지를 조성하고 대우조선 · 삼성조선 등이 크게 성장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내 주택건설이 활발해지고 중동건설 붐이 일어나면서, 건설업이 급격히 성장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중반 이후는 국내 제조업 부문의 생산이 저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업의 선도로 경기가 호전되었다. 건설업 부문의 생산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구성비는 경상시장가격으로 1962년의 3.4%에서 1967년에는 3.9%, 1973년에는 4.8%였고, 1980년에는 9.4%로서 급속한 신장세를 나타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이후에는 건설업 부문의 기업이 많이 출현하였다.
한편, 이 기간에는 외자도입이 본격화하면서 차관에 의한 근대공업의 건설과 합작투자, 외국인 직접투자 활동이 활발하였다. 정부는 외자도입을 촉진하기 위해 여러 법령을 제정, 공포하였고, 직접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지역을 설정하고 여러 면에서 특혜를 주었다. 이에 따라 차관도입이 급증하였고, 이의 배분을 통해 새로운 기업이 생기거나 기존의 기업이 급속히 성장하는 현상을 보였다.
이상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시행되면서 수출지향적 공업화전략이 계속되었고, 수출산업을 중심으로 기업이 급속히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외자의 도입이 급증하면서 외자에 의한 기업의 성장도 현저하였다. 초기에는 원조물자, 뒤에는 외자를 통해 가장 큰 혜택을 본 기업은 역시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이다. 정부의 지원과 외자, 국내 금융기관의 특혜 금융을 통해 1970년대를 통해 급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상품시장의 해외 의존도와 투자재원의 해외비중이 과도하게 증가하여, 국민경제의 재생산과정이 국내에서 완결되지 못하고 해외 부문으로 유출됨으로써, 국내의 수직적 분업체계가 성립되지 못하고, 산업구조가 이중구조로 고착되는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특혜를 통해 급성장한 재벌기업을 포함한 대기업들의 효율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재벌기업 중심의 국민경제 구조를 중소기업과 신기술 중심의 벤처기업 위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국내경제에서 발달되지 못한 부문에 속하는 농업 · 중소기업 · 내수 부문 등에 대하여 투자를 확대하고, 이들 부문을 성장시켜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