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업법>에 따르면, 건설업이란 원도급(元都給)·하도급(下都給) 기타 명칭 여하에 불구하고 건설공사의 도급을 받는 영업을 말하며, 건설공사는 일반공사·특수공사 및 단종공사(單種工事)로 크게 나뉜다.
일반공사는 다시 토목공사와 건축공사로, 특수공사는 철강재설치공사·항만준설공사·포장공사·색도설치공사·조경공사로, 단종공사는 목공사·토공사·미장공사·석공사·도장공사·방수공사·조적공사·비계공사(飛階工事)·창호공사·지붕 및 판금공사·철근콘크리트공사·철강구조물공사·위생 및 냉난방설비공사·기계기구설치공사·상하수도설치공사·보링 및 그라인딩공사·철물공사·철도궤도공사·포장유지공사·수중공사·조경식재공사·조경시설물설치공사 등 22종류로 나뉘어 있다.
건설사업은 고대 이래 왕권의 위용을 표상하고, 수도를 비롯 관아도시(官衙都市)의 건설 및 치세(治世)와 군사에 필요한 성채 축조와, 도로망의 형성, 운하의 개설 등으로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성읍국가로서의 부족사회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몽촌토성(夢村土城)과 삼국시대 이래의 석성(石城) 등이 있고, 특히 조선 인조 때에 안면반도를 절단하여 수로를 만들어 안면도를 형성하는 대역사(大役事)를 해낸 바 있어 비록 작은 수로일망정 육지를 갈라 해수를 개통시켰다는 점에서 이는 세계운하 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이들 역사는 국가가 직접 관장하는 직영공사의 형태로 이루어지며, 국가는 건설사업에 필요한 모든 기술자를 국가 직속 장인(匠人)으로서 장적(匠籍)에 등록하고, 그 밖의 잡역은 백성들의 노력을 징발하여 사역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건설사업을 전담하는 독립관서를 두고 이를 관리하게 하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선공사(繕工司), 조선시대에는 공조에 선공감(繕工監)을 둔 일이 있었다. 따라서, 근대적인 건설업이라는 기업형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나라 건설사에 있어 개항은 중요한 전기가 된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시발로 한 1880년대 초반의 구미제국과의 통상조약으로 외국선박의 출입과 무역량이 늘어나면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항만시설의 수요가 급격히 팽창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하수도시설, 상가시설, 도로와 철도의 건설사업 등이 크게 일어났고, 이와 같은 건설사업은 모두 근대적 과학기술과 결부된 것이어서 종래와 같이 국가가 직영할 수 없게 되었으며, 전문화된 기업인·민간건설사업자에게 용역을 맡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건설사업이 일본인에 의해 설계되고 시공되었으며, 한국인이 주체가 된 건설업체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이리하여 광복 당시 우리 나라 건설업은 거의 미개척상태에 있었다. 상당수의 숙련·미숙련 건설기능공과 약간의 기술노동 공급중심의 하도급업자, 그리고 극소수의 중·하급 기술관료와 일본인 기업에서 훈련된 약간의 기술직·관리직이 있었을 뿐이었다. 광복 후의 건설업은 그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군정청에서 발주되는 주택건설이나 국도개수공사와 미군납공사에 의존하는 형편이었으며, 6·25전쟁 이후에는 전재복구공사를 도급받아 건설업을 영위하였다. 1957년까지는 건설업에 대하여는 조정통제나 보호육성시책이 소홀하였기 때문에 건설업체가 무질서하게 난립하였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1958년 <건설업법>을 제정, 공포하고 면허제를 실시하였으나 별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62년 면허기준을 대폭 강화한 개정 <건설업법>에 따라 정부는 1,000여 개의 건설업체를 정비하였다. 건설업은 제1·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과정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룩하였고, 국내에서의 기반과 경험을 토대로 하여 1966년 베트남의 전재복구 건설사업에의 참여를 계기로 해외진출이 시작되어 우리 나라 건설기술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건설업의 성장과정을 3단계로 구분하여보면, 1945∼1964년을 시발기, 1965∼1978년을 급속성장기, 1978년 이후를 성숙기로 볼 수 있다.
(1) 시발기
광복과 남북분단, 그리고 6·25전쟁에 따른 사회적·경제적 혼란으로 건설업의 성장도 상당기간 부진하였다. 휴전이 성립된 뒤 도시의 재건사업과 각종 건설사업, 그리고 주한 미군을 위한 시설공사가 시작되어 우리 나라 건설업은 의욕적인 출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건설업체는 매우 빈약하였으며 정부발주공사도 소량에 그쳐 업체간의 담합(談合)과 덤핑이 난무하였으며, 여러 가지 부조리가 발생하였고 설계물량(設計物量)과 투입물량(投入物量)이 다른 부실공사가 빈번하였다.
1957년에 들어서면서 경제는 점차 안정국면을 보였으나 국내건설은 대부분 전후사업에 국한되어 있었다. 1960년대 초반에는 4·19혁명과 5·16군사정변 등 정국의 혼란으로 정부의 공사발주가 적었고 이미 계약된 공사마저도 정부의 불확실한 정책으로 뚜렷한 실적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경제재건과 수출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중에 정유시설(精油施設)이 착공되고, 비료·시멘트 등 기간산업이 대폭 확장되었으며, 또한 전력·운수 등 사회간접자본시설도 크게 확충되었다.
그 결과 계획기간중 건설 부문은 연평균 17.4%의 성장으로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여, 건설업계는 많은 시공경험을 쌓게 되었으며, 영세한 건설업체들이 이 기간중 근대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나 건설활동은 전통적이고 노동집약적이었으며, 기술과 자본은 미약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58년 정부는 <건설업법>을 제정, 공포하고 건설사업자의 면허제도와 등급제를 실시하여 건설업계의 정비에 나섰다.
당시 전국의 업체수는 약 1,600여 개에 달하였는데, 정부는 다시 면허의 등급제를 폐지하고 1961년에 건설업에 포함되었던 전기공사를 건설업으로부터 분리시켰고, 5·16군사정변 후 건설업육성책으로 면허기준을 강화하여 전국 건설업체수를 500여 개로 정비하였다. 한편, 1951년에는 대한토목학회, 1953년에는 한국건설협회, 1959년에는 대한건축협회 등이 설립되었으며, 1960년 2월에는 대한건설협회가, 1962년에는 건설군납조합(建設軍納組合)도 창설되었다.
당시 우리의 건설업체는 주한미군시설의 건설에 참여하여 국제적인 표준양식에 의한 건설경험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한미군의 공사발주도 1958년부터 점차적으로 줄어들게 되었으며, 더욱이 196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 미국이 국제수지적자에 따른 달러방위를 위하여 비에이정책(Buy American Policy, BA政策)을 강력히 추진함으로써 국내건설업체는 국내업체와 외국업체와의 합작으로 군납건설에 참여하여 수주계약 및 시공기술 등 해외건설수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2) 급속성장기
제1·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건설업계도 활기에 넘치게 되었다. 이 기간중 건설업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것으로 경부고속도로의 개통, 서울지하철 건설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경제개발계획의 추진에 의한 농지개간 및 경지정리사업, 도로·항만·전력·통신 등 각종 사회간접자본의 건설, 각종 공장과 산업시설의 활발한 건설, 그리고 민간 부문에서도 호텔·빌딩 등에 대한 건설투자가 활발하게 전개되어 1960년대의 건설업은 호황을 누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말에 와서는 건설업계에 불황이 닥치기 시작하였으며, 1971년에 와서는 더욱 심화되어 건국 후 처음으로 건설업이 -7%의 성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1970년대 초기의 건설경기 부진은 베트남의 특별수요가 점차 사라져 가고 정부도 균형과 안정을 위하여 경기억제정책을 펴온 데 기인하였다.
그러나 건설경기가 침체되었을 때에도 고속도로를 비롯한 각종 도로공사, 항만시설의 확충, 수자원개발, 공단조성지원 등 공공부문의 건설사업은 계속 시행되었고, 또한 이 무렵 새마을운동이 가세하여 건설업계의 역량이 꾸준히 배양될 수 있었다.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중 건설투자는 총투자의 34.3%를 차지하였으며, 건설투자 중 72.4%가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 부문에 집중되었다.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는 고속도로와 일반도로 및 항만과 항공 등의 교통 부문에 27.2%, 주택 부문에 21.5%가 이루어졌다.
1956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1차 아시아·서태평양건설사업자회의(IFAWPCA)에서 이미 해외공사 수주를 위한 시장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실제적인 우리 건설업체의 해외진출은 1965년 이후 현대건설주식회사·경남기업주식회사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 뒤 1966년부터는 베트남 파병과 관련하여 해외건설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주로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의 군시설과 병원건립 등이었다.
뒤따라 서남태평양의 미국신탁통치령과 동남아시아지역, 그리고 북미의 알래스카에서도 해외진출이 전개되었다. 더욱이 1973년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중동건설시장에의 진출은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와 같이, 건설업에 의하여 진출확대가 성공한 것은 수출입국(輸出立國)이라는 경제개발의 기본 전략에 부합된 경제계의 대외지향적 진출전략과 고속도로 건설 및 그 동안의 군납건설을 통한 수주계약 기법 및 시공기술의 축적, 해외공사 수주업체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지원 등에 힘입은 것이었다.
(3) 성숙기
1979년 제2차 석유파동과 국제유동성의 궁색, 이란·이라크 전쟁의 여파로 중동시장의 건설수요는 급격한 퇴조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그에 따라 한국업자간의 과당경쟁이 시장의 혼란을 가져왔다. 뿐만 아니라 국내임금의 상승으로 채산성의 악화가 전체 국내건설업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의 해외건설은 이제 그 동안의 기술·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시장의 다변화와 기술집약적 시공 분야로의 전환을 통하여 안정성장을 기할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건설업은 1970∼1996년 사이에 9.9%에 달하는 성장률을 나타내 전체 GDP상승률 8.1%를 초과하였으며 1996년에는 전체 GDP의 11.3%를 차지하고 있다.
(1) 국내건설
건설업은 우리 나라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먼저 사업체 수에서는 1970년 2,998개에서 1995년에는 3만 9533개로 늘어나 약 10.9%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1997년 말 현재 면허를 가진 건설업체 수는 4만 5039개에 이른다. 이 중에서 종합건설업면허를 가진 업체는 전체의 7.6%인 3,423개이고 나머지 92.4%에 이르는 4만 1616개의 업체는 전문 등 기타면허를 소지하고 있다.
이 중 전문건설업 사업체는 전체의 33.7%에 이르는 1만 5178개이고 설비공사업 면허소지 사업체는 5.9%인 2,644개, 전기공사업 면허소지 사업체는 19.3%인 8,689개, 통신공사업 면허소지 사업체는 6.0%인 2,716개, 기타 건설업 면허소지 사업체는 27.5%인 1만 2389개의 사업체가 있다. 종사자수의 측면에서도 31만 명에서 155만 명으로 6.6%가 증가되었다.
수주액 측면에서는 1975년 6180억 원에서 1995년에는 101조 2730억 원으로 평균 29%가 증가되었다. 시공액도 1970년 1920억 원에서 1995년에는 83조 6440억 원으로 27.5% 증가되었으며 이 중에서 원도급공사는 평균 24.8% 증가한 63조 3790억 원이고 하도급공사는 평균 55.4%가 증가한 20조 2660억 원이다. 건설업의 부가가치는 1970년에 1000억 원이던 것이 1995년에는 39조 8990억 원으로 증가하여 27.1%의 증가를 보이고 있다.
또한 유형고정자산면에서도 1970년 390억 원에서 1995년에는 27.9%가 증가한 18조 4820억 원에 이를 정도의 급격한 성장을 보이고 있다.
국내의 건설수주측면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총수주액이 1976년에 7390억 원이었다가 1977년에 처음으로 1조 원을 돌파하기 시작한 후 급격한 성장을 보여 1996년에는 73조 7890억 원으로 1976∼1996년 사이의 기간에 25.9%가 증가하였다. 이것을 발주자별로 살펴보면 공공 부문이 23.0%, 민간 부문이 29.9%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공종별로는 건축 부문이 28.8%, 토목 부문이 23.1%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상대적으로 공공 부문보다는 민간 부문이, 토목 부문보다는 건축 부문의 증가율이 높았다.
1997년 말 현재 전체 건설업의 공사수주액은 115조 8950억 원으로 그 중 종합건설업이 54.3%에 해당하는 62조 9220억 원을 차지하고 있고, 전문 등 기타 부문이 45.7%에 해당하는 52조 9720억 원을 수주하고 있다. 전문 등 기타 부문에서는 전문건설업이 26.9%에 해당하는 31조 1750억 원을, 설비공사업이 6.3%에 해당하는 7조 2720억 원을, 전기공사업이 8.5%에 해당하는 9조 8580억 원을, 통신공사업이 2.9%에 해당하는 3조 3460억 원을, 기타 건설업이 1.1%에 해당하는 1조 3210억 원을 차지하고 있다.
(2) 해외건설
우리 나라 건설업체가 해외시장에 진출한 것은 1965년 태국의 고속도로공사 수주로 그 막이 올랐으며, 당시에는 주로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1970년 초 알래스카에서 교량공사, 1973년 바하마에서 정유공장건설에 참가함으로써 미주에 진출하였고, 같은 해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도로공사를 수주함으로써 중동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1974년 나이지리아의 초자로공사(硝子爐工事)에 참가함으로써 우리의 해외건설은 1970년대 전반기에 이미 유럽을 제외한 전세계로 진출하였다.
이러한 해외진출의 확대와 함께 우리의 건설업체도 수주시공능력이 신장되어 규모면에서 크게 확대되었다. 그 결과 1980년의 세계해외공사수주 2백대 기업체 가운데 우리 나라 건설업체가 23개 사나 포함되었고, 1981년에는 25개 사로 이들의 총수주액은 137억 달러를 기록하여 세계 2백대기업 총수주액의 11.1%를 차지하게 되어 세계 제2위의 건설국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함께 건설업체의 적극적인 해외진출에 따라 국내의 총수주액 중 해외공사의 비중이 점점 커지게 되었는데, 1977년의 57.4%에서 1981년에는 68.9%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외건설수주 및 진출을 보면, 1966년 1,100만 달러의 수주실적을 출발로 1974년까지의 누계는 6억 8400만 달러에 그쳤으나, 1973년 말에 있었던 석유파동을 계기로 연간 1,000억 달러 이상의 석유수입이 중동산유국에 집중되고 그 결과 중동지역의 경제개발사업이 본격화되어 이른바 중동건설 붐이 형성되었다.
즉, 이 이후 중동지역에서는 매년 300∼500억 달러로 추정되는 막대한 건설공사가 발주되었으며, 1975년 이후 우리 나라도 이 지역에서의 건설수주액이 급격히 증가하여 1978년에는 총수주액이 80억 달러를 넘어서는 급증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1979년에는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중동국가들의 개발계획 축소와 이란사태 등으로 이 지역에서의 수주액이 잠시 감소하였으나, 1980년에 들어와서는 이 지역에서의 발주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공사단가가 인상된데다 국내건설불황의 돌파구로서 해외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다시 증가되었으나, 1982년부터 점차 감소하기 시작하여 1985년에 와서는 47억 달러선을 겨우 상회할 정도로 급격히 위축되었다가 1990년대에 들어서야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해외건설진출현황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1980년대 초반에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후반에는 리비아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1980년대 중반의 경우 중동지역이 전체 수주액의 약 90%를 차지할 정도로 이들 나라에 대한 편중이 심하였다. 이후 중동지역은 지속적으로 감소되었지만 1980∼1996년 사이에 아시아지역에서 20%의 증가를 보였고 미주·태평양지역에서는 44.5%, 아프리카에서는 13.1%, 유럽에서는 85.7%의 증가를 보였다.
따라서 해외건설수주가 1990년대에 들어서 회복된 것은 중동이외 지역에서의 수주액이 급격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의 해외건설의 공종별 현황은 토목이 -2.3%, 건축이 1.0%, 플랜트가 12.6%, 기타 -5.6%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해외건설에서 플랜트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