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개혁(currency reform)은 구화폐의 유통을 정지시키고 단기간에 신화폐로 강제 교환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인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화폐개혁의 방식으로는 구권을 신권으로 교환하거나, 고액권을 발행하거나, 통용가치를 절하·유통화폐의 액면가치를 법으로 정한 비율에 따라 절하·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특히 통용가치절하의 방식을 디노미네이션(denomination)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의미를 갖는 화폐개혁은 1905년, 1950년, 1953년, 1962년 4차례에 걸쳐 실시되었다.
디노미네이션과 비슷한 말로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 있는데 이는 화폐의 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표시 방법을 변경하는 것을 말한다. 구체적으로 디노미네이션은 우리나라에서 1950년대에 실시된 화폐개혁으로 화폐가치 절하와 함께 액면표시 방법도 환→원, 원→환으로 변경된 것을 의미하지만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치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지폐의 액면을 동일 비율의 낮은 숫자로 조정하거나 새로운 통화 단위의 화폐로 변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명 ‘화폐정리사업’으로 알려져 있는 1905년의 화폐개혁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경제침탈을 목적으로 행해진 개혁사업이었기 때문에 국가가 자주적 의지로 실시한 화폐개혁은 1950년, 1953년, 1962년 3차례였다. 우리나라의 화폐개혁은 경제적 이유보다 정치적 목적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였으며, 일부 화폐개혁은 긴급통화조치와 병행되기도 하였다.
1950년의 화폐개혁은 한국전쟁 중 실시되었다. 1950년 6월 12일 설립된 한국은행은 업무개시 13일 만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0년 7월 피난지인 대구에서 처음으로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은행권이 조선은행권과 함께 사용되고 있던 가운데 전쟁 중 불법으로 발행된 화폐의 남발과 북한화폐의 유통은 경제를 교란시켰다. 정부는 이러한 비상사태를 수습하고자 1950년 8월 28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0호로 「조선은행권 유통 및 교환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조선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고 이를 한국은행권으로 등가교환(等價交換)하였다. 이 교환은 1950년 9월 15일부터 1953년 1월 16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실시되었고 그 결과 교환대상액 777억원 중 720억원의 조선은행권이 한국은행권으로 교환되었다.
1950년의 화폐개혁은 지역별로 나뉘어 실시되었다. 제1차 교환은 1950년 9월 15일부터 22일까지로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이른바 워커라인 이남 지역과 제주도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제2차 교환은 1950년 10월 25일부터 11월 3일까지 서울·강원·경기 일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제2차 교환 시부터는 세대 당 2만원까지만 현금으로 교환해 주고 초과액은 금융기관에 예치토록 하였다. 제3차 교환은 1950년 11월 11일에서 18일까지 충남북·전남북·경남북·강원 일부 지역에서, 제4차 교환은 1950년 11월 18일에서 1951년 4월 30일까지로 제2·3차의 미시행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정부는 1951년 4월 30일까지 4차례에 걸쳐 화폐교환을 실시하였으나,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미교환 지역이 수개 군에 달하여 1951년 9월 24일부터 특별교환을 재개하였고 1953년 1월 16일 완료하였다.
1953년의 화폐개혁은 한국전쟁 중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당시에는 전란으로 생산활동이 위축되고 거액의 군사비가 지출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날로 더해지는 가운데 세원포착이 어려워 세수가 감소함에 따라 재정적자가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플레이션을 조기에 수습하고 체납국세(滯納國稅)의 일소(一掃) 및 연체대출금 회수 등을 목적으로 1953년 「대통령 긴급명령」에 따라 제2차 긴급통화조치가 실시되었다.
1953년 2월 17일 이후 적용된 긴급통화조치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화폐단위를 원(圓)에서 환(圜)으로 변경(100원→1환)하고 환표시의 은행권 및 주화만을 법화로 인정한다. 둘째, 원표시의 은행권과 전표시의 조선은행권 등 구화폐의 유통을 금지하고, 각종 지급수단도 2월 25일까지 금융기관에 예입하도록 하며, 2월 17일부터 9일간 예금성격을 띤 자금의 인출 및 지급을 정지한다. 이러한 통화조치의 결과 구원화로 표시된 한국은행권 및 조선은행권의 유통이 금지되었고 1953년 2월 17일부터는 다섯 종류의 새로운 한국은행권이 발행되면서 우리나라 화폐의 완전한 독자성이 확보되었다. 한편, 한국전쟁 이후 계속 급등하던 물가가 1958년에 이르러 안정되고 화폐가치에 대한 신뢰도 회복하자, 한국은행은 화폐체계의 정비와 화폐제조비 절감 및 소액거래의 편의를 도모하고자 최초로 주화를 발행하였다. 이로써 한국은행 창립 이후 거의 10년이 지난 1959년에 50환화 및 10환화, 100환화 등 3개 화종이 최초로 발행된 것이다.
1962년의 화폐개혁은 높은 인플레이션 등으로 침체된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경제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외국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격감함에 따라 자립경제 확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금조달책이 필요했던 가운데 1961년 수립된 군사정부는 성장 중심의 강력한 경제운용계획을 공표하였다. 이것이 1962년 발표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이 계획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화신용 및 외환정책 등에서도 각종 지원책이 필요하였던 바, 정부는 1962년 6월 10일 긴급통화조치와 긴급금융조치를 단행하였다. 긴급통화조치에서는 환(圜)표시의 화폐를 원(圓)표시로 변경(10환→1원)하고 환의 유통과 거래를 금지하였다. 또한 구권과 구권으로 표시된 각종 지급수단을 6월 17일까지 금융기관에 예입토록 하고 후속조치로 금융기관의 신규예금은 물론 기존예금에 대해서도 봉쇄계정에 동결토록 하였다.
한편, 한국은행은 새로운 6종의 은행권(500원권, 100원권, 50원권, 10원권, 5원권, 1원권)을 발행하였다. 소액거래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1962년 12월 1일 10전권과 50전권을 발행하였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화폐는 개혁보다는 현재의 액면체계가 정립되는 시기이다. 1970년 11월 30일에는 100원화, 1972년 12월 1일에는 50원화의 은행권을 주화로 대체하였으며, 거래단위가 높아짐에 따라 1972년 7월에는 5,000원권이, 1973년 6월에는 10,000원권이, 1975년 8월에는 1,000원권이, 2009년 6월에는 50,000원의 고액권이 발행되었다.
1950년에 실시된 화폐개혁은 전쟁으로 비교적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지만 북한군의 경제교란 행위를 사전에 봉쇄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또한 동 화폐개혁은 이후 실시된 다른 화폐개혁처럼 시중의 유동성을 흡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으나, 158억원의 현금이 예금으로 전환되면서 인플레이션의 수습에도 도움이 되었다.
1953년 실시된 화폐개혁은 시중에 남발된 통화와 그에 따른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해 시행된 개혁이면서도 경제부흥자금을 조달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긴급통화조치가 긴급금융조치와 함께 실시됨에 따라 화폐교환 시 일부 예금이 봉쇄계정에 동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치로 전체 예금의 24%가 동결되면서 경제부흥을 위한 자금의 동원에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1962년 실시된 화폐개혁은 당시 등장한 군사정부 하에서 재정적자 확대로 누적된 과잉유동성을 해소하고 부정축재자가 은닉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퇴장자금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정부의 예상과 달리 퇴장자금이 풍부하지 않았으며, 1953년 화폐개혁 당시보다 강력한 예금 봉쇄조치를 취함으로써 시중유동성 부족현상이 나타나 산업활동 위축을 초래하였다. 또한 갑작스런 통화개혁으로 경제혼란이 야기되면서 경기가 위축되자 예금봉쇄 조치가 시행된 지 한 달 만에 전면해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