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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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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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지질시대의 식물이 퇴적, 매몰된 후 열과 압력의 작용을 받아 변질 생성된 흑갈색의 가연성 암석.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석탄은 지질시대의 식물이 퇴적, 매몰된 후 열과 압력의 작용을 받아 변질 생성된 흑갈색의 가연성 암석이다.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으나 약간의 무기물질도 함유한다. 유기물은 식물질이 지하에 묻혀 생물학적·물리학적·화학적 과정을 거친 후 남겨진 집적물로서 마세랄이라고 한다. 1960, 1970년대 우리나라의 연료 문제를 해결했다. 석탄 광산에서 고용이 창출되고 석유와 같은 에너지 수입대체 효과로 외화를 절약하는 등 국민경제에 기여해 왔다. 오늘날에는 직접 연소보다는 석탄화학재·탄소재·제철용 코크스 등의 원료로 이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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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지질시대의 식물이 퇴적, 매몰된 후 열과 압력의 작용을 받아 변질 생성된 흑갈색의 가연성 암석.
내용

석탄은 유기물로 구성되어 있으나 약간의 무기물질도 함유한다. 유기물은 식물질이 지하에 묻혀 생물학적 · 물리학적 · 화학적 과정을 거친 후 남겨진 집적물(集積物)로서 마세랄(maceral)이라고 한다. 석탄은 3개의 마세랄군(群)과 10개 이상의 마세랄로 구성된다. 이들 마세랄은 석탄의 종류와 탄화(炭化) 정도에 따라 그 수와 종류가 달라지는데, 현미경하에서는 반사율, 형태와 구조, 색조, 광학적 이방성, 내부반사, 형광성, 연마강도 등에 의하여 구별된다. 국내의 무연탄은 탄화 정도가 매우 높아 몇 종의 마세랄만 확인된다. 그 예로서, 동원탄좌 하탄층은 비트리나이트(vitrinite) 26%, 세미푸지나이트(semifusinite) 44%, 광물 30%이고, 동원탄좌 금천탄층은 비트리나이트 31.5%, 세미푸지나이트 23%, 광물 45.5%이다.

석탄의 근원물인 식물은 지하에 묻혀 오랜 지질시대 동안 열 · 압력의 영향을 받게 되어 탄화가 진행되는데, 초기의 토탄으로부터 갈탄 · 아역청탄 · 역청탄 · 무연탄 · 변성무연탄의 순서로 변하여 간다. 토탄에서 아역청탄 단계까지는 속성작용(續成作用)에 해당되며, 그 이후는 변성작용(變成作用)에 해당된다. 석탄의 탄화정도에 대한 측정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석탄의 반사율을 이용하는 방법이 현재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다. 석탄의 반사율은 비트리나이트에 대한 반사율(Rmoil)로 표현되며, 탄화 정도에 따른 반사율이 비교될 수 있다. 국내 무연탄의 반사율은 Rmoil 3.5∼5.5로서 무연탄 내지 변성무연탄에 해당된다.

석탄을 구성하는 마세랄들은 각각 고유의 화학적 · 물리적 · 광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탄화의 진행에 따라 이들 성질도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세랄의 종류 · 조성비 · 조성상태 · 탄화 정도가 그 석탄의 성질을 결정짓게 된다. 석탄의 화학성분은 탄소 · 산소 · 수소 · 질소 등인데, 같은 탄화 정도에서 비교하여 볼 때 비트리나이트는 산소를, 엑시나이트(exinite)는 수소를, 이너티나이트(inertinite)는 탄소를 지배한다. 또한 석탄의 점결성은 주로 비트리나이트가 지배하며, 형광성은 엑시나이트, 광학적 이방성은 비트리나이트와 이너티나이트에 의하여 각각 지배되며, 석탄의 성질은 탄화정도에 따라서 달라지게 된다.

석탄의 분류를 위해서는 탄화정도 · 구성물질이 기본 요소로 이용되고 있다. 탄화 정도에 의한 분류(coal rank)는 석탄의 휘발분 · 고정탄소 · 발열량 등이 사용된다. 이 분류에 의하면 국내 석탄은 무연탄 내지 변성무연탄에 해당된다. 석탄 구성물질에 의한 분류(coal type)는 식물의 목질부에서 유래한 부식탄(humic coal)과 식물의 화분 · 포자 등으로 구성된 부이탄(sapropelic coal)으로 구분된다. 대부분의 석탄은 부식탄에 해당되며, 국내 무연탄도 부식탄에 해당된다.

석탄의 생성은 지질학적으로 다음 몇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① 삼각주 · 충적수로 · 석호 등과 같은 퇴적분지가 조성되어야 한다. ② 지질시대에서 육상식물이 번성해야 한다. ③ 식물이 집적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④ 열 · 압력 하에서 계속적인 속성작용과 변성작용이 진행되어야 한다. 석탄층은 석유의 경우와는 달리 세계 각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 매장량도 매우 풍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질시대에 육상에 식물이 나타나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고생대(古生代) 중엽의 데본기(devonian)이고, 이 시기의 육상식물이 매몰되어 다음 시기의 석탄기(石炭紀)에 생성된 석탄은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다. 국내의 주요한 석탄층은 석탄기 다음 시대인 페름기(permian)에 생성된 것들이다. 남한의 주요 탄전별 매장량은 〈표〉와 같다.

탄전별\내용 매장량 점유율(%)
삼척탄전 566,606 39.0
정선탄전 450,965 31.1
충남탄전 116,298 8.0
문경탄전 70,336 4.8
강릉탄전 63,764 4.4
단양탄전 61,967 4.3
호남탄전 93,627 6.5
보은탄전 23,818 1.6
기타탄전 4,336 0.3
합계 1,451,717 100.0
〈표〉 전국탄전별 매장량
*자료: 대한석탄공사 홈페이지(2000년)

우리나라의 석탄층은 생성 이래 수 차례에 걸친 지각변동 및 뒤따른 화성탄(火成炭)의 분출로 인하여 변화를 많이 받아 반흑연화(半黑鉛化) 내지 흑연화가 되어 있으며, 지층의 질서도 큰 혼란을 일으켜 탄층의 주향 · 경사 · 탄폭(炭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석탄층이 역전된 경우도 있으며 탄폭의 변화가 심하여 몇 ㎝에서 몇 m에 이르기까지 팽축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 역사에서 석탄에 대한 설명으로 추측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즉, 609년(신라 진평왕 31)에 모지악(毛只嶽)에서 동토함산지(東吐含山址)가 불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모지악이 현재의 어디쯤 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동토함산지는 현재의 경상북도 영일의 갈탄지역일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는 1180년(명종 10)에 평양의 관원이 의연촌(衣淵村)에서 땅이 불타고, 매연이 끊이지 않는다고 조정에 보고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는 조선 말기에 궁내부 내장원(內藏院)에서 소유하고 있던 광산 수는 51개였는데, 이 중에서 석탄으로 표시된 광산 수는 12개로 나타나 있다. 이 12개 광산은 석탄과 철 · 금 · 은광 등을 포함하여 중복된 광산이며, 석탄뿐인 순수 탄광은 강원도 삼척과 경기도 통진 두 곳에 불과하다. 1900년경을 전후하여서는 외국자본과 기술이 침투하여 국내의 석탄 · 흑연 등을 채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하여 채굴을 시작한 우리나라의 석탄산업은 1930년에 유연탄(有煙炭) 40만 톤, 무연탄 48만 톤을 생산하였고, 1944년에는 격증하여 각각 250만 톤과 450만 톤에 이르렀다. 그러나 광복 후 석탄 생산에 눈을 돌릴 겨를도 없던 터에 6 · 25 전쟁으로 인하여 미약했던 시설마저 파괴되어 생산이 부진하였으나 휴전 후 산림보호정책의 강행에 의하여 활기를 찾기 시작하여 1956년에는 무연탄 생산이 180만 톤에 이르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가정용 에너지원(源)의 주류는 신탄(薪炭)이었는데, 1950년 중반 이후 정부의 산림보호정책에 의하여 무연탄으로 대체됨으로써 민수용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였던 것이다.

무연탄 생산의 추이를 보면 제1차 경제개발계획 기간인 1962년부터 1966년 사이에는 생산시설의 확충과 수요 증대로 인하여 생산이 744만 톤에서 1,161만 톤으로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로써 총 에너지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62년의 36.8%에서 1966년에는 46.2%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여 1967년 연탄파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주탄종유(主炭從油)의 에너지정책을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바꾸었다.

이와 같은 정책전환은 그 뒤 무연탄의 수요를 감소시켜 생산을 정체시켰고, 이에 따라서 1967년의 생산량 수준을 1972년까지 유지하였다. 석탄 생산의 부진은 수요의 부진 이외에도 정부의 저탄가정책(低炭價政策)으로 석탄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3년 제1차 석유파동으로 탄가현실화조처가 취해지고 채산성이 호전되자 다시 생산이 증가하여 1975년에는 1,759만 톤으로 증가하였다. 그 뒤 다시 수요의 부진으로 생산이 감소하였으나 1979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생산이 증가하여 1982년에는 2110만 톤을 생산하였고, 1988년에는 2429만 톤을 생산하였다.

생산실적을 석탄공사와 민영탄광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민영탄광은 1962년 390만 톤을 생산, 전체생산량의 52%를 차지하였는데 증가세가 계속되어 1982년에 1522만 톤을 생산하여 7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1988년에는 1907만 톤을 생산하여 78.5%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1990년대 합성화학공업의 원료로서 석유와 천연가스로 대체되었고, 에너지원으로서도 석유의 진출에 따라 그 중요성이 줄어들어 석탄의 생산도 급격히 줄어들면서 폐광촌이 늘게 되었다. 1970년대 이후의 가행탄광수(稼行炭鑛數)를 보면 1972년의 136개에서 1988년 347개에 이르렀으나 1990년대에 오면 그 수는 현저히 줄어 2000년 말 현재 전국의 광업소는 11개에 그치고 있다.

이를 규모별로 보면 1972년 이후 5만 톤 미만의 생산규모를 가진 탄광이 전체의 70∼80%를 차지하였으며 점차 확대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는 탄광이 영세화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5만 톤 이상 30만 톤 이하 규모의 탄광 수는 조금씩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 반면 30만 톤을 넘는 생산규모의 탄광 수는 점차 감소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1993년에는 석탄생산감축 지원금제도를 도입하여 이듬해부터 지원을 시작하였다. 그 뒤 정부는 1996년에 탄광지역의 대체산업지원을 확정하고,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2001년 6월 말 현재 강원도 정선에는 카지노사업을 유치하여 폐광으로 인한 지역적인 산업의 위축을 되살리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을 사용한 시기는 궁내부 내장원의 기록에서 확인된 연대보다 훨씬 오래 전으로 추정되나 늦어도 17세기경부터이며, 처음에는 불이 잘 타는 갈탄의 분포지역 주민들이 겨울철 연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무연탄은 탄화정도가 높고 회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연탄의 성형과 강도 유지에 적합하며 유황분을 소량 함유하고 있어 대기오염이 적다. 따라서 대부분(약 90% 정도) 민수용 연료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밖에는 발전용 연료 등에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길주탄은 1932년 저온건류용(低溫乾溜用)으로 쓰여서 그 곳에서 생산된 제품은 피치(pitch)를 비롯하여 파라핀 · 메탄올 · 포르말린 · 도료 · 페크라이트 · 약품 등 다양한 것이었으며, 아오지탄은 1937년부터 석탄 액화에 사용되어 인조석유를 제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석탄 소비는 대부분이 국내에서 생산되는 무연탄이다. 유연탄은 1960년대 초반까지 철도 및 발전용으로 수입하여 사용되었으나 점차 석유로 대체되어 사용량이 감소되다가 1973년 이후로는 제철용으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석탄은 1960, 7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어 국민 연료문제 해결, 신탄 사용 억제로 인한 민둥산의 산림녹화, 고용창출, 에너지 수입대체 효과에 의한 외화절약 등 국민경제에 크게 기여해 왔으며, 오늘날에는 직접 연소,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전환하여 사용하는 연료용과, 석탄화학재 · 탄소재 · 제철용 코크스 등 원료용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대한석탄공사 50년사: 1950~2000』(대한석탄공사, 2001)
『탄협』 1∼17(대한석탄협회, 1969∼1985)
『한국석탄총람』(광업생산성조사소, 송태윤, 1975)
『석탄자원조사보고서』(한국동력자원연구소, 1978∼1986)
『한국의 광산물』(대한광업진흥공사, 1979)
『한국경제백년사』(경제평론사, 1982)
『석탄광업의 현황』(대한석탄협회, 1983)
『에너지통계연보』(동력자원부, 1983)
『석탄자원조사연구』1∼4(한국동력자원연구소, 1983∼1986)
『한국의 상공업백년』(대한상공회의소, 1984)
『탄광조합이십년사』(대한자원협동조합, 정연수 외,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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