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파동 ()

사회구조
개념
연탄의 공급량 부족으로 값이 폭등한 사회현상. 주유종탄 · 석탄산업 · 오일쇼크.
이칭
이칭
주유종탄, 석탄산업, 오일쇼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연탄의 공급량 부족으로 값이 폭등한 사회현상. 주유종탄 · 석탄산업 · 오일쇼크.
개설

1960년대 이후 두 차례의 큰 연탄파동이 있었다. 첫 번째 파동은 1966년 정부가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강력한 가격통제 정책을 펴면서 발생했다. 정부는 장당 15원이던 연탄 값을 8원으로 묶는 정책을 펴자, 연탄 값 인상을 요구하는 업자들이 생산량을 줄였고, 공급량이 부족해진 연탄 값은 3∼4배까지 오르게 되었다.

두 번째 파동은 1974년 오일쇼크 전후 공급량 부족으로 일어났다. 정부는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기름 값이 오르기 시작하자 연탄 사용을 독려했는데, 시민들은 겨울철이 되기도 전에 연탄을 사 나르기 시작했다. 여름철에 이미 생산량이 바닥나기 시작해 장당 22원이던 연탄 가격이 30원으로 올랐고, 울릉도에서는 80원까지 오르기도 했다.

연원 및 변천

한국에 연탄이 처음 도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였다. 일본인이 평양광업소를 세우면서부터 구멍이 없는 조개탄, 주먹탄 형태에서 점차 구멍 수에 따라 9·19·22·25·32공탄까지 나오게 되었다.

연탄은 한국전쟁 이후 사용이 크게 늘어났으며 한동안 19공탄 중심이었으나, 1965년 삼천리연탄기업사가 22공탄을 생산한 이후 22공탄은 지금까지 가장 널리 이용되고 있다. 연탄은 구멍이 많을수록 연소는 잘되고 열 발생은 많아지지만 빨리 타기 때문에 많이 사용해야 하는 단점이 있다. 연탄을 많이 쓰는 북한은 연탄가스 중독을 일으키는 일산화탄소를 가장 적게 배출한다는 19공탄을 사용한다.

내용

1960년대 도시의 주 연료원이 연탄으로 바뀌자 이로 인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했다. 1965년 가을부터 소비지 저탄량보다 연탄의 수요가 높아져 연탄가격이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1966년 여름부터 시작된 연탄 부족은 겨울을 앞두고 더욱 심해져 시민들의 겨우살이를 위협했다. 정부의 가격 통제로 업자들이 생산을 줄이거나 중단함으로써 한 두 장의 연탄이라도 사기 위해 주부들은 줄을 이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귀해진 연탄은 ‘검은 보석’이라고도 불렸다.

1966년 겨울은 한파가 일찍 닥쳐 연탄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 결과 소비지 저탄량은 구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서울에서도 연탄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했는데, 정부는 에너지정책을 석탄위주에서 유류위주로 전환했다. ‘주유종탄’ 정책으로 인해 석탄 산업은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자 정부에서는 석탄산업 합리화 논의가 시작되었다.

1974년 연탄파동은 여름이 닥치기도 전에 벌어졌다. 정부는 오일쇼크로 원유 값이 폭등하자 1974년 초부터 연탄 사용을 독려했다. 정부가 유가를 인상하자 이에 겁을 먹은 시민들이 기름보일러를 다시 연탄아궁이로 바꾸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몇 년간의 주유종탄 정책으로 석탄 생산량은 제자리걸음을 하는 상황이어서 7월에 벌써 연탄이 바닥날 조짐을 보였다. 연탄파동을 겪은 국민들은 봄부터 사재기에 나섰고, 여름이 되자 그해 연탄 공급량이 동이 났다.

연탄카드, 연탄배급제가 도입되었고, 성난 주부들은 연탄집게를 들고 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는 주부들의 시위가 벌어져 문제가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연탄산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347곳이던 연탄공장은 2014년 기준으로 47곳으로 줄었다. 그러나 4∼5년 전부터 점차 연탄 소비가 늘고 있는데, 2014년 겨울에는 작년 대비 6.7% 정도 증가한 16만 8,000여 가구가 연탄을 원료로 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참고문헌

「한국 연탄의 역사」(강준만, 『인물과사상』130, 2009)
「한마당-정진영: 연탄」(『국민일보』, 2014.11.5.)
「1970 박정희부터 선데이서울까지: 연탄 파동과 에너지 정책」(『경향신문』, 2014.1.18.)
「연탄 이것이 문제다: 파동의 배경」(『동아일보』, 1974.7.24.)
「지방은 여전 연탄파동」(『경향신문』, 1966.11.28.)
「연탄파동 가수요 격증 때문」(『동아일보』, 1966.11.8.)
문경석탄박물관(coal.gbm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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