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파동은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이다. 1973년부터 1974년에 이르는 중동 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 실행,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의 대폭 감축으로 석유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국제 석유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 결과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었다. 오일쇼크 또는 유류파동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도 불황 속 물가 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났고, 성장률 둔화, 무역수지 악화, 외채 폭증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973∼1974년 중동 전쟁(아랍 · 이스라엘 분쟁) 당시 아랍 산유국들의 석유 무기화 정책과 1978∼1980년의 이란 혁명으로 인한 석유 생산의 대폭 감축으로 석유의 공급이 부족해지자, 국제 석유 가격이 급상승하고, 그 결과 전 세계가 경제적 위기와 혼란을 겪은 사건을 말한다. 오일쇼크 또는 유류파동이라고도 한다.
1974년 1월 1일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Organization of Petroleum Exporting Countries)의 석유 수출 가격은 사우디아라비아 기본유종(아라비안 라이트 34도)을 기준으로 배럴당 11.65달러로 고시되었는데, 이는 1973년 10월 수준의 4배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처럼 짧은 기간에 석유가격이 급등하였던 현상을 제1차 석유파동이라 한다. 이러한 파동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원유시장의 구조적 불균형과 국제정치적인 역학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원유시장의 구조와 관련된 것을 보면 1960년대부터 누적된 변화의 압력이 국제석유시장 구조에서 일시에 분출된 것이다. 1973년 세계의 1차 에너지 소비에서 석유가 차지하는 비율은 47%를 웃돌았고 서방 선진국에서는 53%를 웃돌았다.
이렇게 석유소비가 급증하였지만 새로운 유전의 발견과 개발은 소비증가에 따르지 못하여 유가인상 요인은 항상 잠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석유공급 구조는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에 대한 의존도를 점점 높여 왔다.
한편 국제정치적인 관계에서 살펴보면, 1973년 10월 6일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제4차 중동전쟁이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 전쟁은 1967년의 6월 전쟁 당시 잃었던 시나이반도의 탈환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973년 10월 16일쿠웨이트에서 석유수출국기구 걸프만안위원회는 일방적으로 원유가격의 인상을 결의하였다.
제1차 석유파동이 진정된 이후, 1978년 10월부터 1981년 12월 사이에 지속적인 유가상승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를 제2차 석유파동이라고 한다.
제2차 석유파동의 배경은 경제적인 요인과 국제정치적인 요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경제적인 요인으로는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의 석유수입 증가에 따라 산유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이 진행되었고, 선진 소비국에서는 오일달러의 환수 등으로 달러로 표시된 원유가격의 실질구매력이 감소되었는데, 이를 보전하기 위해 실질유가 수준을 1973년 수준으로 회복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아울러 1978년부터 비 석유수출국기구의 산유량이 석유수출국기구의 산유량을 능가하게 되었고, 국제석유시장에서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시장지배력의 다기능화가 진전되었지만 공급부족현상은 상존하고 있어서 만성적인 시장불균형이 지속되던 상황이었다.
국제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면, 1978년 12월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에서 개최된 석유수출국기구 총회가 1979년 원유의 공식가격을 14.55달러로 인상할 것을 결의한 데서 비롯된다. 제2차 석유파동은 1978년부터 시작된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감산조치가 이를 증폭시켰다.
1978년 10월부터 가열된 이란의 정치소요는 점차 전국적 규모의 유혈폭동사태로 발전하면서 세계 제2위의 석유수출국인 이란은 그 해 12월 27일에 전면적인 대외 석유금수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란의 이 같은 돌연한 수출의 중단은 제1차 석유위기 이상의 충격과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제1차 석유파동은 석유의존도가 심한 여러 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석유공급의 양적 제한은 실질적 생산 감소와 생활수준의 저하를 초래하게 된다. 또한 가격의 급격한 상승은 ①인플레이션의 가속화, ②석유수입 지불대금의 증가에 의한 해외로의 소득이전의 증가 → 국내수요 감소 → 불황 · 실업, ③국제수지 악화라는 삼중고(三重苦)를 가져오게 된다.
원유가격은 1973년 10월과 1974년 1월의 인상조치로 약 4배 가까이 급등하였다. 세계경제 전체의 경제성장률이 크게 떨어져 1975년에는 서방 선진국은 마이너스성장을 하게 되었고,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으며, 국제수지도 대폭적인 적자를 기록하였다. 1974년 석유수출국기구 국가의 경제수지 흑자액은 600억 달러에 이르렀다.
제2차 석유파동 기간인 1978년 12월부터 1980년 7월 사이에 석유가격은 약 2.4배(배럴당 12.9달러에서 31.5달러로) 급등했고, 다시 세계경제에 커다란 혼란을 불러왔다. 생산비용의 상승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되었고, 세계 각국의 성장률은 둔화되었으며 무역수지는 악화되었고, 국제금융과 통화질서는 교란되었다.
우리나라 경제는 해외 의존적 경제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제1차 석유파동으로 불황 속의 물가상승이라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 나타났다. 1975년 소비자 물가는 전년대비 24.7% 상승하였으며, 국제수지는 18.9억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였다. 또한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행에 있어서도 상당한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석유파동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1974년 1월 14일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를 단행하면서 자금수요를 억제하는 동시에 자금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통화금융정책도 함께 추진하였다.
이후 1974년 5월, 장기 에너지종합대책을 수립 · 발표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1973년부터 경제성장과 수출신장의 한계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통해 돌파하기 위해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1974년에는 국민투자기금을, 1976년에는 한국수출입은행을 설립하여 금융측면에서 지원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석유파동 후에도 석유파동 등에 대비하기 위한 실질적인 경제의 체질개선은 소홀히 하고, 중화학공업정책을 강행하여 경제규모의 확대에만 몰두하던 중 제2차 석유파동을 맞게 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정부는 석유수출국기구의 원유가격 인상에 영향을 받아 1979년 3월 9.5%의 국내유가 인상조정을 시발점으로 1981년 11월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총 337%의 석유가격을 인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도매물가는 1980년 38.9%, 1981년 22.5%를 기록하는 큰 폭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경제성장률은 1979년 6.5%에 그쳤고, 1980년에는 5.2%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했다. 경상수지 적자폭은 1979년 42억 달러, 1980년 53억 2000만 달러나 되었다. 제1차 석유파동 이후 100억 달러를 상회한 외채는 제2차 석유파동으로 인한 국제수지 적자폭의 증대로 200억 달러를 넘게 되자 외채문제가 심각해졌다.
두 차례에 걸친 석유파동 이후 우리나라 정부는 에너지의 안정적 공급과 위기대응 능력 배양, 해외 자원개발 및 신재생에너지 투자 확대, 에너지절약 이라는 큰 틀에서 에너지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석유수급 안정을 위해, ①정유사의 생산시설 가동률 및 생산수율 제고, ②적정 수입확보 및 재고유지, ③석유저장시설의 탄력적 활용, ④석유제품 수송원활화, ⑤소비자보호 및 불편요인 방지 등의 대책을 매년 마련하여 추진해 오고 있다. 또한, 석유시장의 유통구조를 개선하여 경쟁을 보다 촉진하였고, 정유사 공급가격 공개주기를 단축함으로써 석유가격을 둘러싼 국민의 신뢰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한편, 1980년부터 석유비축사업을 시작하였으며, 2008년 12월말 현재 정부는 7,857만 배럴의 비축유(70.4일분)를 확보하고 있으며, 민간은 6,667만 배럴(52.1일분)을 확보하고 있어 총 122.5일분의 비축유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는 국제에너지기구(IEA)의 권고 기준인 90일분을 초과하는 물량이다.
그러나 국제에너지기구의 주요 회원국인 미국 · 일본 · 독일 등이 우리나라보다 많은 비축 물량을 확보하고 있으며,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고 산업구조가 유사한 일본의 경우 2008년 9월 기준 약 151일분의 비축유를 보유하고 있어, 석유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의 비축유 추가확보 필요성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앞으로 석유파동은 제1 · 2차 때처럼 충격적인 형태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나, 석유파동 재연의 가능성은 남아 있다. 최근 석유가격 동향을 보면, 1990∼2000년대 초반까지 30달러대를 유지하다가, 2000년대 중반 이후 꾸준한 상승을 보이며 2008년에 140달러대까지 상승하였다. 이러한 고유가의 원인은 공급 제한이 아닌 수요 급증에 있으며, 고유가 현상은 장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즉 제3차 석유파동의 위험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때문에 기존의 노력에 더해 에너지 원(原)단위를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개발에 투자와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의 에너지 원단위는 0.323(TOE/GDP 1000달러)으로, 0.104인 일본에 비해 3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는 동일한 양의 부가가치를 생산하는데 한국이 일본보다 3배 이상 에너지를 더 사용한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절약을 위한 국민적 의식전환 운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절약은 석탄 · 석유 · 원자력 · 신재생 에너지에 이은 제5의 에너지이다. 전체 가정 에너지 소비의 11%가 대기전력으로 소비되고 있다. 에너지절약을 위한 교육과 기술개발 투자에 대한 범국민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출처 : 에너지경제연구원, 「국가에너지통계종합정보시스템(KES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