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공업 ()

울산 석유화학 공업단지
울산 석유화학 공업단지
산업
개념
일반적으로 합성 · 분해 · 중합 · 발효 등 화학적 공정을 주로 한 생산방법을 행하는 제조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반적으로 합성 · 분해 · 중합 · 발효 등 화학적 공정을 주로 한 생산방법을 행하는 제조업.
개설

화학공업의 범주에 속하는 제품의 종류는 현재 수만여 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제품의 분류는 제품의 화학적 성분, 원료, 가공도, 제품의 특성 등의 여러 가지 기준에 따르고 있다. 예컨대 제품의 화학적 성분에 따르면, 무기화학제품과 유기화학제품으로 나누며, 가공도 기준에 따르면 기초화학제품·중간화학제품·최종화학제품(정밀화학제품도 포함)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표준산업분류(1998년 개정)의 중분류에 따르면, 화학산업은 코크스, 석유 정제품 및 핵연료 제조업(23), 화합물 및 화학제품 제조업(24), 고무 및 플라스틱제품 제조업(25)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화학공업의 주요 특성으로는 ① 공업 내부에서의 제품 상호간의 연관성이 매우 높으며, ② 여타 산업 부문에 대한 원료제공 부문으로서의 중요성이 매우 크고, ③ 제품의 성격상 기술혁신의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표준산업분류상의 화합물 및 화학제품 제조업(24) 기준으로 화학공업이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생산액은 1963년의 8.2%에서 1996년에는 8.9%로 높아졌으며, 부가가치의 경우에도 1963년의 8.5%에서 1996년에는 9.2%로 높아졌다. 이와는 달리 종업원 수의 비중은 1963년의 5.6%에서 1996년에는 5.2%로 낮아졌는데, 이는 화학공업에는 대규모의 자본집약적 장치산업인 석유화학 분야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수출의 비중은 1970년대까지만 하여도 2∼3%에 불과하였으나, 1997년에는 7.3%로 높아져 화학산업이 내수충족단계를 지나 수출산업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화학공업의 발전과정

우리나라 화학공업의 발전과정을 시기별로 보면, ① 1950년대의 태동기, ② 1960년대의 육성기, ③ 1970년대의 도약기, ④ 1980년대의 구조조정기, ⑤ 1990년대의 성장기 등 네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 화학공업의 역사는 제당·제지·합성섬유 등 소비재제품의 생산이 이루어진 195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일부 기초화학제품, 비료 및 고무공장이 있었으나, 황색염료, 가성소다, 항생물질 등의 기초화학제품들이 선진국과의 기술제휴로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서이다.

특히 1957년에 한미화학에 의해서 우리 기술진에 의한 접촉식 황산제조시설이 가동되었는데, 이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우리나라 화학공업의 효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국산화학제품은 대부분 중간수요부문과 관련되지 않고 소비자와 직접 연결되는 단순하면서도 고립적인 생산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대부분의 주요 화학제품의 수요충족은 수입에 의존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서야 정유·비료 등 대량생산형태의 화학공장이 본격 등장하게 되었다. 이 기간에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1961년 일산(日産) 250t 규모의 충주비료공장이 가동됨으로써 최초로 질소질비료의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 공장의 건설 및 운영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식량자급을 위한 비료공장의 건설이 가속화되었다.

또 하나 1964년 울산정유공장의 가동은 이후 화학공업을 주도하게 될 석유화학공업의 개발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화학공업의 발전과정에서 획기적인 사실이었다. 뒤이어 1967년 호남정유가 여수에, 1969년 경인에너지가 인천에 정유공장을 건설함으로써 화학공업의 발전기반이 한층 공고해졌다.

또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추진되어 왔던 PVC·소다회(Soda) 등의 각종 공장들이 가동단계에 들어서서 화학공업의 생산수준이 크게 제고되었고, 섬유, 요업, 제지 등 화학관련산업의 확장으로 화학공업 자체가 다양화되어 시장구조가 점차 고도화되었다.

한편 1960년대에는 정밀화학 분야에서도 외자도입법의 제정으로 기술제휴 및 합작투자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가운데 수입규제조치 등이 실시됨에 따라 의약품 등 몇몇 정밀화학제품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으며, 산성염료, 농약원제, 음이온 계면활성제 등의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는 국내 화학산업은 전반적으로 그 규모가 영세하였으므로 기초화학제품 및 중간제품과 완제품의 대부분을 수입하는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1960년대에 정유공장이 건설됨으로써 석유화학공업의 원료인 나프타를 국내에서 공급받을 수 있게 된 데다 석유화학공업으로부터 원료를 공급받는 섬유, 플라스틱, 타이어, 세제 등의 관련산업이 개발되자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하기 위한 여건이 충족되었다.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중 중점사업으로 육성하기로 한 석유화학산업은 이러한 여건을 배경으로 1972년 10월에 대한석유공사의 나프타분해공장이 울산에서 가동됨으로써 197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 화학공업은 석유화학 중심의 유기화학공업이 주도하기 시작하였으며, 최종화학제품의 원료가 되는 기초화학제품의 국내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화학공업은 그 연관효과가 크게 제고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석유화학제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에틸렌 기준 연산 35만t 규모의 나프타 분해설비와 연관제품의 생산공장이 여천에 조성되었다. 여천단지의 건설로 기초화학제품 및 많은 관련제품들, 즉 합성수지, 합섬원료, 합성고무 등의 공급기반이 크게 확충되었다. 그러나 생산제품은 주로 범용제품이었으며, 생산체제도 제품간 수직계열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1사 1품목의 독점생산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또 하나의 사실은 단일공장으로 세계 최대규모인 요소 연산 33만t, 복합비료 연산 70만t 규모의 남해화학(南海化學) 비료공장이 완공됨으로써 비료자급은 물론 수출여력까지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또한 정밀화학 분야에서도 수입원제를 희석·배합하여 완제품화하는 가공기술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의약품과 농약 부문에서 원료합성기술의 모방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들어 우리 나라 화학산업은 석유파동으로 인한 국내외 경기침체로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나, 1983년 이후 세계경제의 회복과 국내경제의 고도성장기로의 진입 등에 따라 회복국면을 맞이하였다.

1980년대에는 수입자유화, 유통시장의 개방, 물질특허제도의 도입 등으로 인해 국내 화학산업이 전환기를 맞이한 시기이기도 하였는데, 이때에는 기술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1982년 정밀화학공업진흥회가 발족되고, 1985년에는 정밀화학의 중점육성을 골자로 한 화학공업 구조개선 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다.

또한 1987년 물질특허제도 도입 이후 1989년에는 첨단산업발전 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정밀화학공업이 향후 중점육성할 첨단산업의 한 분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석유화학산업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유가하락과 경기호전에 따른 전자·섬유·자동차 등 수요산업으로부터의 수요급증에 힘입어 비약적인 성장을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국내업체에서는 꾸준한 신증설을 추진하였으나, 1980년대 말까지도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합성수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공급부족상태를 해소하지 못하였다.

1980년대 말 석유화학제품의 수요가 급증하자 정부에서는 1990년 투자자유화조치를 시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기업의 신규진입과 기존업체들의 신증설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1991년에 삼성종합화학과 현대석유화학이 대산에 제3의 석유화학단지를 건설함과 아울러 LG·SK·호남석유화학·한화종합화학·대한유화 등의 기존 대기업들도 1990년대 초에 집중적인 신증설을 단행하였다.

이후 국제 석유화화학경기의 불황과 공급과잉으로 심각한 채산성 악화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1995년을 전후하여 나타난 석유화학경기의 이상호황으로 1990년대 들어 2차의 설비투자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투자붐에 힘입어 우리 나라는 상당한 수준의 수직계열화 생산체제를 갖추게 됨과 아울러 에틸렌 기준으로 세계 5위의 석유화학 생산국으로 부상하였으며, 석유화학산업은 수출산업으로 급부상하였다.

그러나 1997년을 전후하여 세계 석유화학경기가 악화되면서 과잉설비의 해소가 당면 현안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정밀화학 분야에서는 1990년대 들어 화학산업의 정밀화학공업화 추세에 맞추어 대기업의 참여가 활발해진 가운데, 정부에서도 의약품과 농약을 중심으로 한 정밀화학산업을 선도기술개발사업으로 지정하여 민관연의 협동연구를 추진중에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일부의 신물질합성에 성공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고 있으나, 기술개발력의 부족으로 아직은 핵심기술의 자립화는 달성되지 못하고 있다.

화학비료공업

화학비료란 질소·인산·칼륨 등 식물의 생육에 필요한 무기물을 말하는데, 이들은 암모니아·인광석·염화가리·황산 등의 무기화학물질을 원료로 하여 화학적 조작을 통하여 대량제조된다. 우리 나라의 화학비료공업은 일본제국주의가 이 땅의 지하자원과 수력자원을 이용할 목적으로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를 설립함으로써 비롯되었다.

이 회사는 1930년 함경남도 흥남에 연산 48만t 규모의 황안공장을 준공, 가동시켰으며, 이 공장을 확장하여 1934년부터 과석(과인산석회), 1936년부터는 석회질소를 생산하게 되었다. 1930년의 흥남공장의 완공 이후에도 일제에 의해 비료공장의 건설이 계속되어 1939년 화학비료 생산량 총계는 64만t에 달하였고, 우리나라 전체의 비료 수요를 충족시키고 남는 비료 18만t이 수출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국토의 남북양단으로 북한에 편재되어 있던 대부분의 화학비료공장과 발전시설이 상실됨으로써 남한에는 소규모의 북평 석회질소공장과 인천 과석공장 이외에 몇 개의 소규모 유기질비료공장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더욱이 1950년 6·25전쟁으로 빈약한 비료생산시설마저 파괴됨으로써 1960년대 초까지 국내의 비료공급은 거의 대부분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비료도입액은 6,000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대규모 화학비료공장의 건설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고, 정부와 미국원조기관(OEC),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 등과의 협력하에 비료공장 건설계획이 구체화되었다.

미국 국무성의 국제개발처(AID) 자금으로 1955년 9월 충주에 충주비료공장을 착공하여 1961년 4월에 준공하였다. 이 공장은 최초의 대단위 화학비료공장이었고, 이 공장의 준공 가동으로 우리 기술진이 얻은 공장건설 및 운영상의 경험은 이후의 중화학공업 건설에 크나큰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충주비료공장의 생산량만으로는 우리 나라의 비료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됨으로써 정부는 정부보유 2,700만 달러를 들여 충주공장과 같은 규모의 요소비료공장을 전라남도 나주에 착공, 1962년 12월에 준공시켰다. 이 공장은 1968년 나프타 개질시설(改質施設)을 추가하고 요소생산시설을 연산 12만 3000t으로 확장하였다.

1973년 4월 이 호남비료회사는 충주비료회사와 합병하여 한국종합화학주식회사로 개편되었으며, 1980년 3월 비료제조사업을 폐기하고 옥탄올 공장으로 전환하였다.

충주비료회사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기간에 AID차관으로 울산에 영남화학(第三肥)공장과 진해에 진해화학(第四肥) 공장을 건설하여 1967년에 각각 준공시켰고, 삼성그룹은 일본의 상업차관을 도입하여 울산에 요소 연산 33만t의 대규모공장을 1967년에 준공시켰다. 이 공장은 당시의 요소공장으로서는 동양 최대규모였다.

1967년 말 우리나라의 연간 화학비료 생산능력은 113만 2,000t에 달하게 되었다. 같은 기간에 북평의 석회질소공장 보수공사를 하였고, 경기화학공업의 용성인비공장, 풍농비료회사의 용성인비공장, 조선비료공업회사의 화성비료(化成肥料) 공장 등도 건설하였다.

또한, 충주비료공장은 1968년과 1973년의 두 차례 확장공사로 생산규모를 요소 연산 34만 6,500t으로 증가시켰고, 1975년 영남화학의 제2공장과 포항제철공장 등의 준공으로 1975년도 화학비료 생산량은 200만t으로 대폭 증가하여 광복 후 처음으로 화학비료의 자급화를 이룩하게 되었고 오히려 여분이 생겨서 수출까지 하게 되었다.

장차 비료수요가 증대할 것에 대비하여 내수비료(內需肥料)의 장기적인 안정공급을 기하고 아울러 수출도 증대하겠다는 정부시책에 의하여 세계 최대규모의 화학비료공장인 남해화학여수공장(南海化學麗水工場, 第七肥) 건설이 추진되어 1977년 8월에 요소 연산 33만t, 복합비료 연산 70만t의 생산시설을 준공시키고, 1980년 10월에 요소 생산능력을 연 66만t으로 확장하였다.

남해화학공장의 준공 가동으로 우리 나라 화학비료 생산능력 총계는 300만t을 넘게 되었으나 비료의 수요량은 감소하게 되어 내수비료를 공급하고도 130만t이 남는 과잉생산현상을 나타나게 되어 1980년에는 수출실적이 130만 9000t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 뒤 국제시장에서 비료수요의 감퇴와 우리나라 비료의 국제경쟁력 약화로 수출신장에 한계가 있었고 국제비료가의 하락으로 비료생산회사의 경영은 악화되어 정부는 비료수급조절을 위한 비료공업 합리화방안을 수립하였으며, 1987년에 비료산업은 합리화업종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국내 5대 화학비료공장 중 충주비료공장과 진해화학공장·영남화학 구공장 등 세 개의 공장을 폐쇄하고 한국비료공장은 시설의 ½만을 가동시키기로 하였다. 화학비료 총생산능력을 연 170만t으로 조절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농업 부문의 침체와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 제고 등으로 인하여 비료의 내수증가세가 정체상태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업계에서도 탈비료화를 위한 업종다각화를 추진함과 아울러 원가절감을 위한 공정의 개조, 신종개발을 통한 상품다양화, 저인산질비료의 개발 등에 힘쓰고 있다.

정밀화학공업

석유화학 등으로부터 제공받은 기초원료를 합성하여 추출한 중간체 및 원제를 다단계의 공정을 거쳐 배합·가공하여 완제품을 생산하는 가공형 화학산업을 말한다. 정밀화학제품을 분류하면 크게 의약품·농약 등의 생리활성물질과 화장품·도료·염·안료·계면활성제·촉매·각종 첨가제·사진감광재 등의 기능성 화학물질로 나누어진다.

정밀화학공업의 기술적, 경제적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개별제품마다 제조공정상의 독특한 기술적 특성이 있고, 모방생산이 어려우며, 제품수명 주기가 짧아 지속적인 기술개발 투자가 경쟁력의 관건이 된다. 둘째, 정밀화학공업은 제조공정상 고도의 기술을 요하여 제품의 부가가치율이 높으며, 석유화학 등 장치산업에 비해 에너지소비량도 적어 자원 및 에너지절약형 산업이다.

셋째, 정밀화학제품은 의약품·화장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타산업의 핵심원료 및 부자재로 사용되고 있어 연관효과가 큰 산업이다. 또한 정밀화학공업은 소규모 자본집약산업으로서 중소기업의 형태로도 전문화가 가능하다.

정밀화학공업은 기술의 생성과정이나 제품의 생산계통상으로 볼 때 일반적으로 기초 원료→중간체→원제→완제품의 순으로 계열화되어 있다. 정상적인 발전과정을 거친 선진국의 정밀화학공업은 이들 전 과정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밀화학공업은 핵심기술의 부족으로 중간체와 원제를 수입하여 완제품을 가공하는 단계에서 출발함으로써 다소 기형적인 발전과정을 거쳤는데, 석유화학 분야의 급성장으로 기초원료의 경우 상당한 자급을 이루었으나, 중간체와 원제의 경우 아직도 국내수요의 상당량을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정밀화학공업은 1950년대에 유화염료 및 항생물질 일부를 선진국과의 기술제휴에 의해 생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의 정밀화학공업은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도입과 합작투자가 활발히 진행됨과 아울러 정부의 의약완제품 수입억제조치 등에 힘입어 주로 의약품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제조공정이 비교적 단순하고 자본이 적게 소요되는 도료공업과 세제공업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는데, 특히 세제공업은 1966년 럭키화학공업주식회사가 처음으로 합성세제를 생산하면서부터 종래의 유지가공업의 범주를 벗어나 새로운 화학공업으로서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식량증산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농약제조업은 1957년 <농약관리법>의 제정으로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의 정밀화학공업은 기초가 되는 석유화학산업이 개발·정착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밀화학제품은 석유화학 기초원료와 정밀화학 중간원료 또는 원제를 수입하여 간단한 합성·가공·희석·배합·포장 등의 단순한 물리적 가공을 하여 최종완제품을 생산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내 정밀화학공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였다. 즉 1972년에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가, 1979년에 여천석유화학공업단지가 완공됨으로써 국내 정밀화학공업이 국내에서 생산된 기초화학제품의 공급기반을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조성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기술개발의 중요성을 깨달아 중간화합물로부터 원제를 합성하는 기술을 모방하여 원제가 생산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원제합성공정에 대한 기술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한 결과 상당한 정도의 원제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농약 부문은 50% 정도가 국산화되면서 수입대체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의약 부문에서도 원료의약품을 비롯한 일부 품목들이 수출되기도 하였다.

기술개발과 관련하여 이 시기에 특기할 만한 점은 1976년 포항의 타르분류공장(Tar分溜工場)이 국내 기술진에 의하여 완공되었으며, 1977년 정부와 업계 공동출연의 한국화학연구소가 대덕(大德)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국내 기술발전에 자극되어 선진국의 다국적 화학기업들은 우리 나라에 물질특허의 도입을 강력히 요구하는 등 자국의 기술보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는 수입자유화, 유통시장의 개방, 물질특허제도의 도입 등 국내시장의 개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로서 정밀화학공업에 대한 관심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수입하여 사용되고 있던 정밀화학제품 및 기술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모방에 의해 국산화되었으나, 후반기에는 점차 모방적 기술개발단계를 벗어나 자체적 신물질 창출개발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특히, 정밀화학분야에 대한 대기업의 참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공정의 자체개발 등 연구개발도 활성화되었다.

1980년에 분산염료의 생산을 개시하였고, 1982년부터 시작된 제5차 경제개발계획기간중 과학기술처의 특정연구개발사업에서 정밀화학산업이 연구개발의 한 분야로 되었다. 1984년에는 지금까지 분산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정밀화학 관련업종에 대한 정책을 통합·체계화하는 한편 선진국의 지적소유권 개방압력에 대응하기 위하여 한국정밀화학공업진흥회를 발족시켰다. 이 외에도 1986년에는 신약연구조합과 촉매연구조합이 결성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1980년대에 구축된 신물질 창출연구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정부에서 G7 선도기술개발사업으로 신물질창출연구사업을 계속 추진하면서 신의약과 신농약을 중심으로 한 신물질을 합성하는 단계에 진입하였으며, 대기업과 국책연구소를 중심으로 합성한 신물질을 선진국에 기술수출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특히 의약 분야에서 성과가 두드러져 동아제약과 한국화학연구소가 공동으로 초강력 비마약성 진통제 신물질을 개발하여 일본에 그 기술을 수출하였고, 미원은 차세대 항생물질인 설팍탐을 세계에서 두번째로 개발하였으며, 일양약품도 신물질 항궤양제(抗潰瘍劑)를 개발하였다. 기능성 물질 분야에서도 LG화학이 분산염료 신물질인 BLUE염료를 개발하여 미국과 일본 등지에 기술특허를 출원하였으며, 태흥산업은 신분산염료 3개 품목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물질특허제도의 도입 이후 국내업체들의 수출개발노력이 활발해져 특허출원건수에 있어 1987∼1990년간 5.6%에 불과하였던 내국인의 출원건수가 1991년 이후로는 전체 출원건수의 20%에 달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밀화학산업은 선진국의 다국적 화학기업들에 비하여 기술축적과 자금력 측면에서 절대열세에 머물러 있으며, 신물질 창출기술도 전체적으로는 초보적인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기초화학공업

중간화학제품 및 최종화학제품의 원료로 사용되는 기초화학제품을 생산하는 화학공업을 말한다. 기초화학제품은 가성소다·소다회, 각종 산 및 알칼리 등 무기화학제품과 메탄올·에틸렌·방향족 등 유기화학제품, 그리고 산업용가스 등이다. 기초화학제품은 특정한 물질의 합성 또는 중합에 의하여 제조되어 제품에 따라 일정한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동일한 제품에서는 품질의 격차가 거의 없으며 따라서 가격수준이 경쟁력을 좌우한다.

석유화학공업의 기반이 취약하였던 1960년대까지의 기초화학공업은 주로 무기기초화학공업이었으며, 비료공업·섬유공업·유리공업을 주된 수요기반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특히 1960년대 중반까지는 우리 나라의 기초화학공업은 화학비료의 원료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한 나라의 무기기초화학공업 발전의 지표로 간주되고 있는 황산(黃酸)은 1957년 한미화학주식회사가 접촉식 제조방법으로 일산(日産) 10t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며 생산이 시작되었는데, 이 공장의 가동이 우리나라 무기기초화학공업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충주비료공업주식회사는 1960년에 일산 400t의 암모니아공장을, 1965년에 일산 150t 규모의 질산공장을 건설함으로써 화학비료의 원료공급기반을 더욱 확충하게 되었다.

또한 황산과 함께 무기기초화학공업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가성소다는 1958년부터 전해식(電解式) 방법으로 국산화가 이루어졌다. 주로 유리공업에 사용되는 소다회는 유리공업의 발전에 따라 수요가 증대하게 되자 동양화학주식회사가 국내에 풍부히 부존되어 있는 석회석을 이용하는 솔베이법으로 연산 6만 6000t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였다.

각종 유기용제(有機溶劑)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메탄올은 1968년 호남비료(한국종합화학주식회사에 합병되었음)가 고압법(高壓法)에 의한 연산 1만 5,000t 규모의 공장을 준공함으로써 처음으로 생산되었으며, 1971년에는 저압법에 의한 연산 4만 5,000t 규모의 공장이 울산에 건설되었다.

가소제(可塑劑)의 주원료로서 도료 및 화공약품에 많이 사용되는 무수(無水) 프탈산(phthalic anhydride)은 1968년에 애경유지주식회사가 연산 3,600t 규모의 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PVC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1972년에 연산 8,400t 규모의 공장이 울산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까지의 기초화학공업은 화학비료 및 섬유의 원료 등 그 수요처가 일부 산업에 국한되어 전방연쇄효과가 낮았다.

1973년 이후에는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가 건설됨에 따라 기초화학공업은 무기화학 중심에서 유기화학 위주로 그 구조가 개편되기 시작하였다. (주)유공(油公)이 나프타분해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중요한 유기기초화학제품이 처음으로 생산되었고 합성수지·합섬원료·합성고무·합성세제 등 최종화학제품분야도 급성장하였다.

1979년에는 호남에틸렌주식회사가 여천석유화학공업단지에 에틸렌 연산 35만t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을 건설하였다. 여천석유화학공업단지의 가동으로 올레핀과 방향족은 거의 100% 국산화되었으며, 기초화학공업이 여타 공업에 기초소재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무기기초화학제품의 시설도 많이 확충되었다. 1977년 단일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규모인 남해화학주식회사의 준공에 따라 황산과 암모니아의 시설이 대폭적으로 확장되었고 소다회 시설도 건설경기의 호조에 힘입어 유리제품의 수요가 증대함에 따라 연산 24만 5,000t으로 확장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석유파동으로 우리나라 기초 화학제품의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으며, 공급과잉에 따른 합리화계획의 일환으로 연산 5만 9,820t의 암모니아공장이 폐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국내 기초 화학공업은 국내외 경기호황을 바탕으로 하여 석유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급성장세를 나타내었으며, 그 결과 석유화학공업이 기초 화학공업의 성장을 주도하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삼성과 현대 등 신규 업체의 진입으로 대산석유화학단지가 새로이 조성됨과 아울러 기존 업체에서도 신증설투자를 확대함으로써 우리 나라 기초 화학공업은 공급능력 면에서 괄목할 만한 신장세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성장에 힘입어 우리 나라의 기초 화학공업은 석유화학 분야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자급을 이루게 됨은 물론 여유물량을 수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물량면에서의 이와 같은 높은 성장에도 불구하고 공정개발, 촉매제조 등의 핵심기술 부족으로 원천적인 경쟁력이 선진국에 비해 낙후되어 있는 가운데 집중적인 신증설에 따른 공급과잉의 해소가 당면 현안으로 부상하고 있다.

정유공업

국내 최초의 정유공업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조선석유주식회사가 원산에 연산 30만t 규모의 정유공장을 건설함으로써 비롯되었으나, 이 공장은 제2차세계대전중 가동이 중단되었다. 광복 이후 우리 나라 정유공업은 1962년 대한석유공사의 창립으로 시작되었다.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부터 석유의 안정공급이 없이는 경제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정유공장 건설을 이 계획의 최우선 사업으로 채택하여 1962년 대한석유공사의 설립을 결정하였다. 대한석유공사는 한국산업은행과 걸프(Gulf)사의 합작으로 설립되었고 1964년 울산정유공장이 가동을 개시하였다. 대한석유공사는 이후 급격히 증가하는 국내 유류 수요를 충족하였고 나아가 정유공업의 개발기반을 조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제2의 정유회사인 호남정유는 럭키그룹과 칼텍스(Caltex) 간에 1967년 50%씩의 출자로 설립되어 1969년부터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칼텍스의 우리 나라 진출은 한국 정유산업의 독점을 배제하고 소비자보호 및 원유도입선 다양화의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데에 큰 의의를 가진다. 또한, 경인에너지는 한국화약그룹과 유니온(Union Oil of California) 간에 1968년 50%씩의 출자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1960년대를 정유공업의 개발기라고 한다면 1970년대는 성장기 또는 확충기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유공업은 1970년대의 고도경제성장을 통하여 그 시설능력이 계속 확충되어 정제시설능력은 1970년 일산 22만 배럴에서 1979년 일산 58만 배럴로 확장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산유국과의 합작 정유회사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이란석유(쌍용정유의 전신)는 쌍용그룹과 이란의 국영석유회사(National Iranian Oil Company, NIOC) 사이에 1976년 50%씩의 출자로 설립되었으며 1980년 5월 가동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1970년대는 기존 정유3사의 계속적인 시설확장과 산유국과의 합작에 의한 쌍용정유의 신설로 정유공업이 양적·질적 성장을 이룩한 시기였다.

이러한 정유공장 및 정유사 설립과정을 거쳐 현재 국내 정유산업은 SK에너지[구 SK(유공)]·GS칼텍스[구 LG칼텍스정유(호남정유)]·S-Oil[구 쌍용정유]·현대오일뱅크[구 현대정유(극동정유)] 등 4개 사의 과점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외국합작선은 1970년대 말 제2차 석유파동을 전후하여 칼텍스를 제외하고 전부 철수하였으나, 1984년 현대정유가 증설을 하면서 미국의 Getty Oil사가 자본 참여하였고, 1991년 8월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Aramco사가 쌍용정유와 중질유 분해 및 탈황시설의 건설을 위한 합작계약을 체결하고 자본참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 국내 정유사의 합작선은 Caltex사·Aramco사 및 Getty Oil사 등 3개 사가 있다.

순조로운 성장세를 보였던 국내 정유산업은 1980년대 중반에는 국제유가의 급등, 국내 석유소비신장세의 둔화로 가동률이 70% 수준에 머무는 등 기업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외 경기호조와 관련산업의 성장으로 석유소비가 급증하면서 국내 정유산업은 질적·양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시현하였다.

활발한 신증설로 1997년 현재 세계 10위의 정제시설능력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석유소비의 고급화추세와 환경규제에 따라 중질유 분해 및 탈황시설이 꾸준히 확대됨으로써 석유정제의 고도화가 크게 진전되었다.

국내 정유업체들은 또한 1980년대 후반 이후 석유화학·윤활유·발전 등 관련산업으로의 사업영역 확대를 통해 종합에너지회사로의 성장을 추구하고 있으며, 해외유전 개발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국내 정유산업은 석유산업의 개방, 석유제품의 가격자유화 및 환경친화적인 산업으로의 전환을 강요하는 환경규제 등으로 인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세계 원유공급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우리나라의 의존도가 높은 중동지역의 정세불안 등으로 세계 석유시장의 불안요인이 상존하고 있으며, 1995년 3월에 발효된 “기후변화에 관한 협약”으로 국제적인 환경규제가 한층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정부의 “석유산업자유화계획”에 따라 1997년부터 석유가격 및 수출입이 자유화된 가운데 1999년부터는 정유산업의 신규진입 자유화 및 대외개방이 시행될 예정으로 있어, 석유제품의 판매 및 유통분야에서 치열한 경쟁 및 구조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합성수지공업

우리나라의 합성수지공업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페놀수지의 성형(成形)부터 시작되었다. 1950년대에는 페놀수지와 요소수지가 처음으로 생산되었고, 열가소성수지(熱可塑性樹脂)의 사출(射出) 및 압출성형(壓出成型), 캘린더가공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에 비로소 합성수지 가공업이 성장하기 시작하여 이를 계기로 합성수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원료수지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는데, 1960년대 초까지는 비교적 간단한 제조시설과 기술을 요하는 멜라민수지·폴리에스테르수지·알키드수지 등의 열경화성수지(熱硬化性樹脂)가 소규모로 생산되었다.

1966년부터 1972년까지를 제2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원료수지의 개발기로서, 1966년 한국플라스틱공업에 의해 염화비닐수지공장이 건설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열가소성수지의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열가소성수지의 생산능력은 급격히 증가되었다.

1967년에는 공영화학공업(共榮化學工業)이 6,000t, 1968년에는 한국화성공업(韓國化成工業)과 동양화학공업이 각각 1만 5,000t 및 6,000t, 1969년에는 우풍화학공업이 1만t의 설비를 건설하였다. 1968년에는 일반용 폴리스티렌공장이, 1969년에는 내충격성(耐衝擊性) 폴리스티렌공장이, 1970년에는 발포성(發泡性) 폴리스티렌공장이 계속 건설되었다.

제3기는 1972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본격적인 발전기로서, 1972년 10월에 울산석유화학콤비나트가 완공되어 단지 내에 나프타분해공장을 비롯한 일곱 개의 계열공장이 준공됨을 계기로 원료수지의 본격적인 국내공급이 시작되었다. 즉, 에틸렌·프로필렌·염화비닐 등 합성수지의 기초원료가 생산됨으로써 그 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조달이 국산으로 대체되었으며, 저밀도폴리에틸렌·폴리프로필렌 등의 생산이 시작되었다.

1972년 이후 석유화학공업은 6년간에 17개의 계열공장이 연이어 준공됨에 따라 1979년 6월 당시 15만 5,000t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과 24개의 제품계열공장을 보유하게끔 성장하였다. 1979년에는 여천에 새로운 대규모의 제2석유화학콤비나트가 건설됨으로써 우리나라 합성수지공업은 원료수지에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합성수지 공장건설 추이를 보면, 럭키화학(樂喜化學)은 1977년 11월에 5만t 규모의 PVC공장을 여천에 건설한 뒤 1979년에 10만t, 1983년에 15만t 규모로 시설을 증설하였다. 저밀도폴리에틸렌은 1972년 한남화학이 울산석유화학 계열공장으로 연간 5만t 규모의 설비를 건설한 뒤 1979년에는 여천석유화학 계열공장으로 연간 10만t 규모의 공장을 추가로 완공하였다.

고밀도폴리에틸렌은 1975년에 대한유화(大韓油化)가 울산석유화학계열공장으로 연간 3만 5,000t 규모의 공장을 건설한 뒤 1979년 호남석유화학이 여천에 7만t 규모의 설비를 건설하였으며, 1980년에는 대한유화가 7만t 규모로 증설, 확장하였다. 폴리프로필렌은 1972년 대한유화가 울산석유화학계열공장으로 연간 3만 5,000t 규모의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그 뒤 증설이 이루어졌다.

1979년에는 호남석유화학이 여천에 연간 8만t 규모의 시설을 완공시켰다. 폴리스티렌은 1970년에 미원의 발포성 폴리스티렌공장이 건설된 이후, 1979년에는 울산석유화학계열공장으로서 증설되었으며, 1982년에도 증설이 이루어졌다.

합성수지공업은 1980년대에는 초반기의 유가파동과 경기불황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으나, 중반 이후의 경기호조를 바탕으로 관련산업의 수요가 꾸준히 늘어남에 따라 높은 성장세를 지속하였다. 수요증가에 대응하여 업계에서 꾸준한 신증설을 추진함에 따라 국내자급은 물론 일부를 수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현대와 삼성의 대산단지 건설과 기존 업체의 활발한 설비투자에 힘입어 공급능력이 급팽창하게 되었다. 특히 기초원료 분야에서 급격한 신증설이 이루어짐에 따라 수직계열화을 통한 원가절감을 기하고자 대부분의 대형 석유화학업체들이 다운스트림 분야인 합성수지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합성수지의 생산능력은 저밀고폴리에틸렌·고밀도폴리에틸렌·폴리프로필렌·폴리스티렌·염화비닐수지·ABS 등 6개 품목기준으로 1989년 320만 3,000t에서 1997년 말에는 886만 2,000t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또한 이러한 설비투자붐에 따라 1980년대 말까지 품목당 1∼2개 사의 과점생산체제가 유지되었던 합성수지업계는 1990년대에 들어 5∼8개사의 경쟁적인 생산구조로 전환되었다.

1990년대의 생산능력 급팽창으로 여유생산물량이 늘어남에 따라 업계에서 이의 해소를 위한 수출확대를 꾸준히 추진한 결과 합성수지는 전체 생산물량의 절반 가까이를 수출하는 수출주력품목으로 부상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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