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업은 전자운동의 특성을 응용한 기계 기구 및 부품·재료를 제작하고 조립하는 공업, 나아가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를 포함하는 공업이다. 1959년 국산 전자제품 시작을 알리는 진공관 라디오가 생산되었다. 이후 한국 전자공업의 전환점이 된 것이 1973년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으로 1970년대 전자공업은 오늘날 한국 전자공업의 기초를 놓았다. 1980년대 이후 구조개선의 노력이 이루어져 첨단 전자제품 부문도 세계시장에 내놓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21세기 현재 세계 3대 전자산업 생산 국가이다.
전자공업 혹은 전자산업은 전자관이나 반도체소자 또는 이와 유사한 부품을 사용하여 전자운동의 특성을 응용한 기계 기구 및 이에 주로 사용되는 부품 · 재료를 제작하고 조립하는 공업, 나아가 정보통신기술산업[ICT]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를 포함하는 공업으로 세계 기술 전쟁의 최첨단 부문을 맡고 있다. 세계인이 한국의 상징으로 가장 많이 꼽고 있는 한국의 대표 산업이면서 세계 최상급 메모리반도체와 휴대전화, 고화질 대형 TV 수상기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자공업은 한국 경제발전의 기적을 상징하고 있고 나아가 한국 경제를 이끄는 선도 공업으로 계속 유지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초 진공관 라디오의 조립은 1958년에 이루어졌다. 이어 1959년 11월 15일에 금성사는 국산 전자제품의 시작을 알리는 진공관 라디오 A-501을 개발하여 공급하였으며 제품명에서 마지막 01은 ‘국산 1호’를 의미하였다.
국산 라디오 생산에 고무된 한국 첫 전자제품의 개발과 생산이 1960년대 들어와 왕성하게 이어졌다. 1966년 첫 TV 수상기 생산이 이루어졌다. 전자라는 명칭을 처음 기업명에 사용한 한진전자공업이 1967년 창업하였으며 한국시그네틱스가 같은 해 6월 25일부터 한국에서 집적회로[IC] 조립생산을 시작하였다. 1968년 1월 19일에 모토로라 코리아가 공장 준공식을 하고 생산에 들어갔는데 이는 모토로라의 유일한 해외공장으로 한국은 이미 1960년대 전자공업 생산지로 주목받았다. 1968년 3월 26일에 김향수가 아남산업을 창업하여 한국 기업 최초로 반도체 사업에 착수하였다.
첫 반도체 기업이 설립된 1968년, VHF 송수신기와 이어폰이 국내에서 생산되어 새로운 전자제품 생산 시대가 열렸고 첫 산업용 기기인 EMD식 교환기의 대만 수출도 이루어졌는데 초기부터 전자공업 수출이 강조되었다. 1969년, 금성사는 한국 최초의 세탁기 WP-181을 개발하였고 나아가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금성전자를 설립하였다. 통신기 회사인 대영전자, 실리콘 트랜지스터 생산 합작회사인 한국도시바도 설립되었다. 1969년에도 수출이 계속 강조되어 전자공업 생산의 53.2%가 수출되었다. 당시 전자공업의 투자 주체별 생산액 점유율을 보면 외국인 단독 사업체 혹은 합작 사업체가 41.9%를 차지해 1960년대까지의 한국 전자공업의 대외 자본 의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1960년대 한국 전자업계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이었다.
1960년대 이루어진 전자공업의 발전을 대내외적으로 광고하면서 동시에 이를 수출 확대로 연계시키기 위한 한국전자전람회가 기획되어 1969년 제1회 한국전자전람회[한국전자전]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아남산업이 한국 기업 최초 반도체 부품 생산 및 21만 달러 수출에 성공하는 등 1970년 세계 수출 시장에서 한국 전자제품의 수출 비중이 0.56%로 높아졌다. 한국전자전람회는 전자공업의 기술 문제를 부각시키는 역할도 하며 매년 개최되었고 대통령이 한국전자전람회에 직접 참석하여 한국 전자제품의 대내외 광고와 관심 제고를 위해 노력하였다.
전반적으로 1972년까지 한국의 전자공업은 기기 대 부품의 생산 비중이 38.8:61.2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선진 공업국의 하청 부품 생산이 중심이 되어 있었고 특히 주문생산의 집적회로 비중이 23.5%에 달하였다. 이러한 한국 전자공업의 전환점이 된 것이 1973년 1월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이었다. 가장 먼저 2월 금성사는 전자, 전기 공장을 분리하였다. 전자공업을 강화하고자 하는 한국 전자공업계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전자공업을 6대 중점 공업의 하나로 지정한 중화학공업화정책 선언과 함께 국내외에서 한국 전자공업에 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화신산업과 소니, 아남산업과 마츠시타전기산업[松下電器産業], 삼성전자와 코닝클라스 등 합작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대한전선, 금성사, 화신산업의 컬러 TV 수상기 생산 추진 등 내국인 사업체의 진입도 확대되었다. 동시에 1973년 공산품 물품 세율 인하, 외제 유입 근절로 가전제품 내수가 급증하여 공급능력 부족이 나타났고 상공부 역시 신규 전자제품 개발과 생산을 늘리겠다고 밝혀 대우실업, 대농, 국제실업, 롯데, 화신, 새한칼러 등 다수의 대기업이 전자공업 진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1973년 닥쳐온 제1차 석유파동으로 전자공업을 주도하던 대기업들의 전자공업 진입 계획이 계획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한국 전자공업을 주도하던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는 소극적으로 돌아섰다. 이때 위기 극복에 적극 나선 것은 국내 부품업체들이었다. 삼화콘덴서, 한국마벨, 삼미기업, 고려전자, 남성흥업, 동남전자 등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 회원사들은 1973년 말부터 5개월 동안 계속 부품가를 인하하였다.
1974년 컬러 TV 수상기 시험 생산에 성공한 한국나쇼날전기는 1월 26일 컬러 TV 20대를 미국에 시험 수출하였다. 이날 미국 모토로라 출신 강기동 박사가 귀국하여 한국반도체공업을 설립하였다. 강기동은 당시 단순 조립이 아니라 한국이 독자적인 고부가가치 반도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한국반도체공업의 선각자이었다. 실제로 한국반도체공업의 반도체 집적회로 웨이퍼 생산 공장은 최첨단의 3인치 웨이퍼 가공 가능 시설을 갖추어 당시 2인치 가공시설을 갖춘 반도체 선진 공업국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1974년 말 한국반도체공업 국내 지분 50%가 삼성의 이건희에게 넘어갔다.
제1차 석유파동은 선진 공업국 기업들의 비용 상승과 함께 이들 고가 제품에 대한 수요 감소를 가져왔고 이에 한국 기업에는 위기와 함께 오히려 한국 전자공업의 세계시장 점유율 확대를 가져왔다. 그 결과 1974년 한국의 전자공업은 수출 목표를 2년 앞당겨 초과하는 5억 18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하여 세계 전자공업 수출액의 2.3%를 차지하게 되었다.
1975년은 한국 전자공업사에서 새 기원을 마련한 해였다. 9월 1일 한국반도체공업의 강기동 박사는 C-MOS LSI 제품인 전자 손목시계용 반도체 KS-5001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3,000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한 LSI칩을 생산한 것은 세계 4번째로 일본보다도 1년이나 앞선 것이며 C-MOS LSI가 한국에서 공급되었다는 것은 독자적인 한국 반도체공업, 한국 정밀 전자공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해 1975년에 한국 기업에 의한 회로판[wafers] 제작 사업도 시작되었고 이와 함께 새로운 국산 전자제품인 AM/FM 부착 카세트 녹음기, 복사기 생산도 시작되었다. 1975년 4월 순간 수상 방식의 절전 TV 수상기 보급은 수요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하여 TV 보급은 1975년엔 200만 대를 돌파하였다. 이러한 혁신과 성공으로 1975년 전자공업 사업체 수와 종업원 수는 385개사에 10만 명을 돌파하였다.
1970년대 후반 양적으로 전자공업은 정상적인 속도를 넘어서며 성장하였고 일본의 세계무역 마찰을 이용한 수출도 확대되고 있었다. 고도성장 가운데 특히 수출이 강조되어 1976년 한국 전자공업은 1969년 상공부의 ‘전자공업진흥 8개년계획’ 목표인 1976년 4억 달러를 대폭 초과한 10억 36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하였다. 1977년 3월 7일에 한국전자통신은 1980년 전자교환기 ITT MIOCN기종 조립생산 예정으로 현판식을 하였으며, 기계식을 넘어 전자식 교환기를 채택하게 된 것은 산업용 전자 시대를 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70년대 후반 전자공업 호황에 대기업들의 전자공업 진입과 확장 의지는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여기에 중동 건설 붐에 따른 오일달러 국내 유입은 전자제품 내수시장의 폭발적 확장을 가져와 한국 전자공업의 발전과 안정을 촉진하였다.
1977년 7월 6일, 금성전기가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공동으로 개발한 국내 최초 국산 컴퓨터 발표회를 열었으며 이는 컴퓨터 산업에 관한 관심을 높여 한국 컴퓨터 산업 국산화를 앞당기는 촉진제의 역할을 하였다. 이해 10월에 열린 제8회 한국전자전람회는 기존 흑백 TV, 라디오, 전자 탁상계산기 등이 뒤로 빠지고 태양전지, 컬러 TV 수상기, 뮤직센터, 그리고 구내 사설교환기 등이 중심에 등장하여 한국 전자공업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세계 전자공업을 주도하고 있는 일본과 유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하여 전자공업을 중점 육성하였고 그 결과 전자공업의 GDP 비중은 1970년 1.26%에서 1977년 5.08%로 급등하면서 세계 11위의 전자제품 생산국이 되었고 1978년에는 자본주의 세계시장 전자공업 생산액의 1.5%를 생산하는데 이르렀다. 1979년 광섬유통신 시험이 이루어졌고 전자교환기와 VCR 등의 전자제품 국내 생산도 시작되었다. 반도체 전문 기업 아남산업은 전자부품 업계로서는 처음으로 1979년 9월 24일에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1979년 9월 28일에 제10차 아시아전자회의[AEC]와 제6차 아시아전자연맹[AEU]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27개 국가가 참석하였는데 이는 한국 전자공업의 성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1970년대 전자공업은 고도성장을 이루면서 수출을 주도하였다. 우선 성장 면에서 보면 전자공업은 1970~1979년간 연평균 성장률 46.4%를 달성하여 제조업 평균 17.8%를 2.5배 이상 웃돌았다. 그 결과 1979년 전자공업 생산은 세계 생산량의 1.6%를 점하며 생산액 11위를 차지하였고 수출은 1979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 3.3%로 급등하며 세계 전자제품 수출 순위에서 10위 위치를 지속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정책에 따른 한국 전자공업의 양적 성장은 오늘날 한국 전자공업의 기초를 놓았으며 일단 선진국형 두뇌 전자공업으로 발전시키는 소지를 조성하였다.
1980년 한국의 중화학공업에서 정부 정책도 그러하였지만 그보다 대기업 집단 기업들은 일관되게 수출에 대해 적극적이었고 이는 대만과 대비되는 한국의 특징이었다. 전자공업은 20억 400만 달러 수출로 세계시장 점유율 3.3%를 유지하면서 세계 9위가 되었고 특히 흑백 TV 수상기는 514만 4000대 수출로 세계 1위에 올랐다. 1980년 한국전자공업진흥회는 한국전기용품제조협회를 흡수 통합하였고, 한국 전자공업 발전에서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한국 최초의 국산 컴퓨터 생산업체이고 수출업체이었던 삼보컴퓨터가 청계천 상가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와 전자공업의 기업 환경은 악화하였다. 고금리와 중화학공업 비판 등 국내 환경만이 아니라 선진 공업국의 수입 규제 등 무역마찰과 원자재 가격 폭등, 중국 등 발전도상국들의 추격 그리고 국제금융시장의 불안정 등 해외 환경까지 극도로 악화하였다. 결국 1980년대 들어 구조개선의 노력이 이루어졌다. 한국 전자공업은 부품 주도적 생산구조를 탈피하여 1981년 가정용 전자기기 1조 1020억 원, 부품 1조 2060억 원의 생산 균형을 맞추었고 또한 낙후된 산업용 전자기기 생산의 증대를 추구하여 산업용 전자기기의 생산 증가율이 가정용 전자기기와 부품의 증가율을 넘어섰다. 이를 기초로 하여 1982년 고성능 레이더, 텔레프린터 개발 그리고 1983년 64K 디램(DRAM) 생산과 퍼스널컴퓨터, 핵자기공명 단층 촬영기 개발이 이어졌다.
1980년대 양적 성장을 기초로 한 한국 전자공업의 질적 성장 필요성을 확대한 것은 한국 내의 노동시장 구조변화와 함께 해외 부문의 한국 전자제품에 대한 견제이었다. 1982년 10월 16일 상공부는 1980년대 전자공업 장기 육성 방안을 마련하여 산업용 전자공업의 비중을 1991년까지 31%로 상향하고 1991년 전자공업의 세계시장 점유율을 4.2%까지 올리겠다고 밝혔다.
한국 업체가 만든 8비트 개인용컴퓨터가 한국 시장에 첫선을 보인 1983년 7월은 한국 컴퓨터 산업의 본격적인 출발 시점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같은 해 11월 한국의 가전 3사 금성사, 삼성전자, 대우전자 역시 MSX 컴퓨터 생산에 진입하였다. 이 해 1983년은 삼성전자가 반도체산업 진출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현대전자산업이 반도체 시장에 진입한 해로 이런 점에서 1983년은 한국 컴퓨터만이 아니라 한국 반도체의 본격적인 출발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IBM이 한국에서 1985년 16비트 개인용컴퓨터를 판매하고 특허권, 저작권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출발부터 한국의 컴퓨터 산업은 미국 기업의 방해를 견뎌내어야 하였고 반도체는 1984년 일본 기업들의 무차별적이고 연속적인 가격인하로 생존 자체를 위협받아야 하였다.
이런 시련 속에서도 1980년대 중반부터 금성반도체, 삼성전자, 그리고 신규 진입한 현대전자산업과 대우전자, 대우통신의 경쟁과 선전으로 한국 전자산업을 세계에 알린 반도체와 가전기기의 국산화, 고급화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한국 전자공업은 한 부분 한 부분 기술 독립과 함께 기술 수출도 진행해 나갔다. 1986년 현대전자산업은 경기도 이천 종합전자공장 1단계 준공식을 거행하였다. 이천공장은 연산 88만 개의 반도체 웨이퍼 가공시설과 3억 6000만 개의 반도체칩 조립 공장 그리고 연산 30만 대의 퍼스널컴퓨터 및 주변기기 생산 공장을 갖추었다. 1987년 11월 18일에 한국의 전자산업은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였고 이해 전화 1000만 회선이 달성되었다. 이러한 한국 전자공업, 반도체공업의 성공에는 삼성 기흥공장과 현대 이천공장 건설을 위해 그린벨트와 농지를 공업용지로 전환하는 등의 거시적인 국민 비용도 투입되었다. 1988년 6월 22일 한국반도체장비협회가 창립총회를 갖고 설립되었다.
한국 전자공업의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인 개선이 시작되자 미국 상무성에 이어 EC집행위원회의 한국 전자제품 덤핑 판정 등 해외 부문의 한국 전자제품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견제에 대한 대응으로 한국 전자공업은 해외 현지생산을 확대하여 금성사 · 대우전자 · 삼성전자 3사의 해외 생산 규모는 1988년 7억 달러, 1989년 11억 달러로 확대되었고 해외 생산기지는 14개소에 이르렀다.
한국의 가전제품이 비교적 초기부터 대기업 중심으로 발전하여 온 것과 대조적으로 반도체, 컴퓨터 등 신기술 제품의 초기 발전에는 중소기업, 소규모 업자들의 결정적 역할이 있었다. 나아가 1990년 초반까지 국내 PC 사용 환경에 필요한 각종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외국 제품 토착화 과정은 대부분 미국과 일본 정부에게서 동양 최대의 복제 소굴로 비난받던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여기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은 당시로서는 일반 PC 업체들도 손댈 수 없었던 고난도 기술을 요하던 분야의 생산물이었다. 그러나 한국 전자공업 발전에서 이들 중소기업, 소규모 업자들이 수행하였던 기초 역할은 오늘날 별로 기억되고 있지 않다.
1990년대 한국 전자공업은 컴퓨터 해외 수출도 성공시켜 나가는 등 1980년대 질적 개선 시도를 기초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첨단 전자제품 부문도 세계시장에 내놓기 시작하였다. 1990년 8월 10일에 삼성전자는 일본 · 미국에 이어 최첨단 16M 디램 시제품 개발 성공을 발표하였다. 1990년 11월, 32개 통신 관련 업체가 한국전파산업진흥협회를 설립하였고 1991년 11월, 한국반도체산업협회[Korea Semiconductor Industry Association]가 출범하여 같은 해 12월 22일에 기존 한국반도체장비협회를 흡수, 통합하였다.
삼성전자는 1992년 9월 25일 세계 최초 64메가 디램 개발에 성공하였다고 발표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디램 시장에서 일본의 도시바를 제치고 매출액 세계 1위에 올랐다. 이어 1994년 8월 29일 세계 최초 256M 디램 개발 성공을 발표하였고 1995년 에스램(SRAM)에서도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1994년 삼성전자는 256M 디램 개발을 광고하면서 한말 태극기를 사용하였는데 256M 디램 개발은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가 동등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알리는 성과이었다. 1994년 8월 금성사와 금성통신이 합병되어 1995년 1월 회사명을 LG전자로 변경하였다.
1994년에는 반도체 단일 품목의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였으며 1996년부터는 시디엠에이[CDMA] 이동통신이 본격화되었고 1999년에는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2000만 명을 넘어서는 등 한국은 1990년대 세계 IT 강국으로 등장하였다. 1996년 삼성전자는 1GB 디램을 개발하여 세계 반도체산업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급성장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대해 일본에 이어 미국의 견제가 이어졌지만 한국은 “한국 반도체의 성장이 일본 기업을 견제할 수 있다”라는 논리로 미국의 통상마찰을 약화해 나갔다. 세계의 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96년 2월 27일 한국전자공업진흥회는 한국전자산업진흥회로 변경되었다.
2000년 한국의 전자공업 수출이 전체 수출의 39.2%로 40%에 육박하였다. 2000년 9월 LG정보통신이 LG전자에 흡수되어 LG전자 통합체제가 이루어졌고 2002년 10월 대우전자의 가전사업 부문이 대우모터공업으로 이전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1일에 대우모터공업은 회사명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변경하여 종합 가전 회사로 새출발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대우전자는 해체되어 한국의 전자산업을 이끌었던 LG, 삼성, 대우 3두 체제가 삼성과 LG의 2두 체제로 개편되었다.
전자산업의 구조변화에 따라 2003년 7월 4일에 한국전자회로산업협회가 창립총회를 가지고 창립되었다. 그리고 2005년 한국 전자제품 생산은 세계시장의 7%를 차지하였고 전자제품 수출은 1028억 달러로 일본, 미국, 중국에 이어 4번째로 10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를 기초로 전자공업의 성장과 국가경제에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2006년 10월 제1회 ‘전자의 날’이 개최되었다. 2008년 6월 한국전자산업진흥회는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로 명칭을 변경한 후 10월에 전자전, 반도체전, 디스플레이전을 통합한 한국전자산업대전을 통합 개최하였으며 2010년 7월 3D융합산업협회를 출범하였다.
2010년 정보통신방송기기 수출만으로 1539억 4000만 달러가 되어 전자공업 부품과 기기 수출 1500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2014년 9월 1일 국가 산업 발전에 공헌한 공로로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는 국가 산업 발전 유공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고 이어 2015년 3월 11일에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는 ‘세계 표준의 날’에 국제 표준화 활동과 국가 산업 발전 유공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는 2019년 10월 8일 전자산업 6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2020년 IT 정보통신방송기기 부문만으로 수출액이 1835억 1000만 달러로 1800달러를 넘어 전자공업 하드웨어 수출 2000억 달러 목표로 나아가게 되었다. 전자공업을 정보통신기술산업 중 서비스 부문을 제외한 정보통신방송기기에다가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를 더하여 보면 전자공업의 생산액은 2018년 427조 8000억 원으로 400조 원을 돌파하였고 사업체 주1는 2021년 9,140개로 9,000개를 돌파하였다. 특히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부문 사업체 수가 2021년 3만 1695개에서 2022년 6만 6676개로 110.4%, 2배 이상 늘어나면서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및 디지털콘텐츠 시대를 열었다. 전자공업에 종사하는 총종사자 수는 2021년 101만 1736명으로 100만 명을 돌파하였고 2022년에는 상용근로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한국의 고용에서도 전자공업은 양과 질에서 그 중요도가 높다.
수출액은 2018년 23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전자공업의 무역수지 흑자 1,132억 2000만 달러를 달성해 흑자 1100억 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2022년 수출 2541억 6000만 달러로 2500억 달러 수출액을 다시 돌파하였다. 특히 한국 수출 품목 1위로 전자공업의 핵심으로 성장한 반도체의 수출은 이미 2018년 1200억 달러를 돌파한 후 2022년 다시 1308억 7000만 달러로 13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반도체는 2023년 한국 전체 수출의 15.6%를 차지하였다. 2023년 12월 20일 전자기기 및 부품 제조 공업 기업체들로 구성된 한국전자산업협동조합은 중소기업협동조합 일자리 창출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의 전자공업은 현재 도전과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다. 한국은 21세기 들어 2000년대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 2010년대 미중 무역 갈등, 2020년대 세계 코로나19 충격과 세계시장 축소, 그리고 우크라이나 사태, 중동 갈등 등 글로벌 공급망 교란과 세계적인 금리 불안 등 세계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도 다시 수출 증가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이를 기초로 세계 3대 전자산업 생산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