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업진흥법」 제2조(정의)에서는 “전자관·반도체소자, 기타 이와 유사한 부품을 사용하여 전자의 운동과 특성을 응용하는 기계·기구를 제조하는 사업”이라고 전자공업을 정의하고 있다.
전자공업은 흔히 전기공업과 뚜렷이 구분되지 않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전자공업은 전자의 운동을 정보로 하여 이용하는 기술을 핵심으로 하는 산업인 데 비하여, 전기공업은 전자의 운동을 에너지로 이용하는 기술을 중심으로 성립된 산업이다.
전자공업의 산업상 특징은 연구개발비가 가장 많이 드는 두뇌집약적 산업이며, 석유화학·정밀기계공업·우주항공·기계·통신·의료 등 전후방파급효과가 매우 큰 산업이고, 대표적인 저에너지·저자원소비산업인 동시에 고도의 두뇌와 기술, 그리고 노동이 복합적으로 집약된 고부가가치산업이다.
이와 같은 산업상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전자공업은 부존자원이 적은 반면, 잠재적 우수인력이 풍부한 우리나라의 산업여건에 부합되는 비교우위산업으로서 전략적 육성이 요구되는 분야이다. 또한, 전자공업의 범위는 크게 기기와 부품으로 구분되어 왔으나, 오늘날에는 크게 전자재료·부품·기기·시스템 등으로 구별된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1882년(고종 19) 체신사업을 관장하는 우정사(郵政司)가 설립되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1885년에는 국내외의 여건에 의하여 전보국이 설립되었고, 인천과 한성 간에 국내 최초의 전신시설이 개통된 이래 한성에서 평양을 거쳐 의주에 이르는 서로전선(西路電線)을 미국의 기술과 청나라의 차관에 의하여 완성시켰다.
1887년에는 영국기술진의 도움으로 한성-공주-대구-부산을 잇는 남로전선(南路電線)이 완공되었다. 또한 1902년에는 한성에서 최초로 전화교환업무를 시작한 데 이어 인천·개성·평양·수원 등에서 전화가 개통되었고, 1904년 노일전쟁 직전까지 전화사업은 꾸준히 전개되어 전국에 전보지사(電報支司) 33개 소와 전화지소 4개 소가 설치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우리나라의 전기통신사업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와 대륙진출이라는 목적하에 추진되어 전기통신업무의 관리와 기술분야의 중요한 직책을 일본인들이 독점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기술축적은 별 진전이 없었다.
그러나 1927년 경성방송국이 처음으로 라디오방송을 실시하면서 방송사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1935년 이후 1945년까지 부산·평양·대구·광주 등 국내 각지에 지방방송국이 설치되었다.
이와 같이 지방방송국이 늘어남에 따라 라디오는 방송 시작 당시 1,440대에서 1935년에는 약 5만 대, 1945년 광복 당시 약 30만 대의 규모로 증가하여 우리나라 전자공업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6·25전쟁 중 인쇄매체를 통한 의사소통이 어려워지자 전파매체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라디오 수요가 급증하였다.
더욱이 1954년 최초의 민간방송인 기독교중앙방송국이 방송을 개시하면서 라디오 보급이 더욱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내수 증가는 라디오의 국내 생산기반을 제공하게 되어 1959년 주식회사금성사에 의하여 라디오의 국내생산이 시작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1956년 국내 최초의 텔레비전방송국이 설립되어 흑백텔레비전시대의 개막을 위한 토대가 구축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을 계기로 강력한 특정 외래품 판매금지조처에 의하여 종래 국산화는 되었다.
그러나 군수물자 및 밀수품의 범람으로 생산이 부진하였던 라디오가 본격 생산되었으며, 1962년에는 주식회사금성사에 의하여 국산라디오가 최초로 수출됨으로써 전자제품수출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통신시설 확충사업이 적극 추진됨에 따라 자동교환기의 국산화가 실현되었고, 각종 통신기와 전축부품 등이 생산되었으며, 업체들의 설립도 활발하여 1964년에는 40여개의 생산업체가 설립되었다.
이 밖에도 많은 군소업체들의 참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한편, 1961년에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이 시험전파를 발사한 뒤, 1964년 TBC-TV가 서울·부산에 방송국을 개설하면서 본격적인 흑백텔레비전시대가 전개되자 흑백텔레비전의 국내 생산이 추진되었다.
또한 1960년대 중반 이후에는 저렴한 노동력을 겨냥한 외국인업체의 국내진출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와 같은 전자공업기반의 성숙과 더불어 1960년대 말에는 전자공업이 국내 산업여건에 적합한 성장산업으로 크게 부각되었고, 1969년에는 전자공업의 전략적 육성을 위한 「전자공업진흥법」이 공포되고 한국정밀기기센터·국립공업연구소·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진흥기관으로 지정되면서 활발한 지원활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부터는 전자공업의 기초분야인 부품 및 원자재의 국내공급을 지원하기 위하여 공장건설계획을 수립, 추진한 결과 생산의 증가와 함께 비약적 수출증대를 이룩하였다. 1973년에는 처음으로 전자제품이 교역흑자를 기록하였고 1976년에는 수출액이 10억 달러를 넘었다.
한편 흑백텔레비전의 생산이 계속 증가하여 1974년에는 100만 대를 넘어섰다. 또한 기술집약적 제품인 반도체생산이 활발해졌다. 1975년에 반도체웨이퍼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가공되었으며, 1976년 주식회사 오리콤은 과학기술연구소와 공동으로 국내 기술진에 의하여 컴퓨터 조립에 성공하였다.
한편, 1970년대 중 오일쇼크나 인플레이션, 그리고 원자재 가격의 급등으로 인건비 비중이 상대적으로 저하되어 우리나라 전자제품의 경쟁력 확보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가전업체를 중심으로 제품품질의 균일화와 원가절감을 실현하기 위한 시설자동화가 추진되었고, 아울러 1978년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의 제정으로 전자공업의 균형발전을 위한 전문화와 계열화가 촉진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 정부는 전자공업을 성장주도산업으로 선정하여 전자공업구조고도화를 위한 여건조성에 제반 노력을 경주하였다. 금융·세제상의 지원으로 설비 및 연구개발투자를 촉진하고 전자기술인력의 확보를 위하여 해외전문인력을 적극 유치함과 아울러 국내 기술인력양성을 위한 전문교육기관설립을 추진하고 정부출연 연구기관을 통하여 기초기술개발에 주력하는 등 지원정책을 폈다.
이와 같은 추세에 부응하여 업계는 컴퓨터·반도체·광통신 등 첨단기술 분야를 중심으로 대규모의 시설 및 연구개발투자를 추진하여 시설의 자동화를 통한 품질향상과 기술개발을 통한 신제품개발과 제품기능의 다양화를 실현함으로써 경쟁력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반도체첨단제품인 64KDRAM 개발에 성공하여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좁히고 최첨단기술인 256KDRAM 개발에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컴퓨터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신규업체가 다수 참여하여 생산이 대폭 증가됨으로써 컴퓨터 대중화를 가속시키고 있으며 광통신 등의 고성능 통신장치와 시분할 전자교환기, 프린터 등에도 집중적인 투자가 진행되었다.
이로 인하여 국내 전자공업의 생산구조가 기술집약적인 산업용기기 중심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였다. 1985년에 256KDRAM을 개발하였고, 1986년에는 256KSRAM을 개발하였다. 8·15광복 이후 우리 나라 전자공업의 발달과정을 연도별로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건전지를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1946년 대한전기통신학회가 창립되었다.
1947년 전선을 생산하였고, 1957년 국립공업연구소 전자공학실이 발족되었다. 1958년 주식회사금성사가 설립되고, 1959년 국내 최초로 진공관식 라디오를 생산하였고, 원자력연구소에 전자공학실이 발족되었다.
1960년 트랜지스터라디오와 자동전화기를 생산하였고, 1962년 콘덴서(condensor)를 생산하였으며, 라디오를 수출하였고 「전기통신법」을 공포하였다. 1963년 대한전기공학회가 사단법인 대한전자공학회로 개칭되었고, 1966년 진공관식 흑백텔레비전을 생산하였고, 전자공업이 수출전략산업으로 지정되었으며,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67년 한국전자공업협동조합이 창립되었고, 1968년 「전자공업진흥법」이 공포되었다. 1969년 제1회 전자전람회가 개최되었고, 1970년 한국전자제품수출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전자공업진흥계획이 확정, 공고되었다. 1974년 컬러텔레비전을 생산하였고, 1976년 한국전자공업진흥회가 발족되었으며, 한국전자기술연구소가 설립되었다.
1977년 한국전자통신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1979년 전자교환기를 생산하였다. 1982년 전자공업진흥기금을 조성하였고, 한국데이타통신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84년 전자산업발전민간협의회가 구성되었고, 1985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가 발족되었다.
1986년 반도체연구조합이 결성되었고, 1987년 전자제품의 수출액이 100억 달러를 넘었으며, 1988년 해외에 전자제품공장을 활발하게 진출시켰다.
우리나라의 전자공업은 성장 초기부터 소재 및 부품 등 기초산업의 성장기반이 없이 적극적인 외국인투자유치를 통한 단순조립생산에 치중해 왔기 때문에 대외의존적 수급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1970년대 중 전자공업 총 생산에 대한 수출비율은 60%를 상회하였고 총 수요에 대한 수입비중은 3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해외시장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1968년 이후 1983년의 수급추이를 보면 수출비율과 수입의존율이 점차 감소하고 있어 우리나라 전자공업기반이 점차 안정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기간 품목별 생산비중도 중요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1970년대 초까지는 외국인업체가 주축이 되어 단순조립하여 생산한 부품이 생산·수출상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1974년 이후에는 내국인업체의 주도로 전화되면서 가정용기기의 비중이 크게 높아졌다.
1980년대에는 산업용기기의 비중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고도성장을 가능하게 한 원인을 분석해 보면 전자공업의 특성상 단순노동집약 부분과 기술집약 부분으로 구별되어 국제분업이 용이하였던 만큼 저임노동력이 풍부한 우리나라에 외국인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전자공업이 우리나라 실정에 적합한 산업이라 판단한 정부가 적극 지원하였으며 성장과정에서 세계경기가 활발하여 쉽게 성장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생산품목의 변화추이를 보면 1968년에는 가정용기기 중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이 주종을 이루었고 산업용기기는 전화기와 교환기를 제외하고는 생산이 미비하였다.
그러나 전자부품은 집적회로와 개별소자를 중심으로 비교적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국민소득수준 향상으로 흑백텔레비전·녹음기·앰프 등의 생산증가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전자탁상계산기를 비롯한 산업용기기의 생산비중도 증대되었다.
1980년대에는 컬러텔레비전이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녹음기·흑백텔레비전 등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VTR·전자레인지 등 고급가전제품의 신장이 두드러졌다.
또한, 컴퓨터와 컴퓨터주변기기의 생산이 급증하고 전화기 무전송수신기 등 통신기기와 사무자동화추세에 따른 전자복사기·전자계측기 등의 생산이 크게 증가하여 산업용기기의 생산비중이 증대하였다.
한편 부품 부문에서는 집적회로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나 고급제품의 생산이 늘고, 컬러텔레비전의 생산증가에 따른 전자관 생산이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 전자공업은 수출증대에 의하여 주도되어 왔는데 1968년 이후 1986년까지의 연평균 수출증가율은 40%를 상회하였다.
이러한 수출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우선 우리나라가 저임노동력을 바탕으로 노동집약제품에서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정부의 강력한 수출지원정책과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유치정책 등에 의하여 수출산업화 여건이 조성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주요 수출품목의 변화추이는 생산품목의 변화와 대동소이한데 1968년 집적회로를 비롯한 전자부품수출이 전자공업수출총액의 81.2%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975년에는 라디오·흑백텔레비전·녹음기 등 가전제품이 수출총액의 34.1%를 차지하여 비중이 크게 증대되었다.
1983년 가전제품의 수출비중도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나 전화기, 컴퓨터 및 컴퓨터 주변기기 등의 수출이 급증하였다. 한편 수출시장 구조를 보면 수출대상국은 계속 증가하여왔다. 그러나 수출 총액의 70%가 미국·일본에 치중되어 있어 이들 양국의 경기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더욱이 우리나라 전자제품은 국내 업체의 해외판매능력이 부족하여 수입업자상표에 의한 수출이 많았다. 따라서 가격·디자인·부품 등의 선정에서도 수입업자들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1962년의 전자공업체는 21개 업체였는데, 1976년 482개 업체, 1988년 1,357개 업체로 증가하였다.
생산액은 1962년 530만 달러에서 1976년 16억 1,078만 달러였고, 1988년에는 235억 3,031만 달러에 달하였다. 수출액은 1962년 49억 달러에서 1976년 10억 3,688만 달러였고, 1988년에는 151억 6,187만 달러에 달하였다.
전자공업은 기술혁신이 급속히 이루어지는 분야인 만큼 선진국에서는 막대한 기술개발투자를 계속해 오고 있다. 그러나 생산기반기술이 확립되지 않고 자본이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선진기술의 도입, 소화에 치중해 왔으며 자체기술개발은 이제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국내전자공업의 기술개발추이는 기술도입에 의한 국산화 과정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1960년대에는 진공관 및 트랜지스터 회로기술에 중점을 두어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의 국산화가 실현되었고, 1970년대에는 집적회로 사용기술에 초점을 둔으로써 컬러텔레비전·VTR·전자레인지 등의 국산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까지는 기술개발보다는 단기적인 수출증대에 치중하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1980년대에 들어 세계시장에서 우리나라가 노동집약제품에서의 우위유지가 점점 어려워지자 기술개발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기술개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하나는 주요 가전제품의 국산화율을 제고하는 측면과 첨단기술의 개발을 통하여 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좁히려는 측면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이미 결실을 맺고 있는데 VTR·텔레프린터·팩시밀리·데크메커니즘·철도신호장치 등의 국산화율이 크게 제고되었으며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64KDRAM, 8비트 마이크로프로세서, 반도체 재료인 4인치 실리콘단 결정 등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한편, 우리나라가 습득한 기술을 후발개발도상국에 플랜트수출도 시도하고 있는데 1980년 흑백텔레비전 제조기술을 태국에 수출하였으며, 인도네시아·인도 등에 컬러텔레비전 플랜트를 수출하였다.
반도체는 소형·고성능·저가격·고신뢰성 등의 특색으로 인하여 집적회로(IC)의 형태로 우리 전자산업의 하드웨어 부문의 핵(核)을 이루고 있다. 부품은 제외하고라도 반도체는 가정용·산업용을 불문하고 국내 전자기기와 시스템산업발전에 있어서 주역을 담당하고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반도체연구조합·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조직되는 등 반도체산업은 반도체제품뿐만 아니라, 반도체제품 생산장비·장치는 물론, 관련 재료개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한편, PC(개인용 컴퓨터)를 비롯한 주변기기, 이동통신기기를 포함한 통신기기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수출의 신장도 전자산업의 국제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전자산업은 소프트웨어 부분이 비중을 높여가게 되어 종래의 전자공업과는 그 양상이 크게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전자공업진흥회가 전자산업진흥회로 개편된 것도 이와 같은 경향을 비경으로 한 것이라 하겠다. 전자산업은 1990년대 초반에는, 80년대까지의 도입기술 일변도에서 탈피를 시작, 독자적 기술정보(Know-How)를 축적하게 되었고, 전자공업과 기술의 해외진출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제품소재·부자재·요소부품을 비롯, 결정적 요소기술의 많은 부분이 일본을 비롯하여 해외에 의존하였다. 1980년 후반부터 소재의 국산화 비중의 증대촉구, 기술개발 촉진, 품질향상 강화 등이 업계의 노력으로 크게 진전되었다.
이것은 우리 주변의 중진 및 후발국가들이, 1960년대의 우리처럼 공업화 정책아래서 전자산업진흥을 강화시킨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1990년대에는 전자산업의 국제화가 더욱 심화되었고, 국내전자산업은 1997년부터 IMF사태를 맞이하게 되어, 새로운 전환점에 서게 되었다.
이 때 PC산업과 이동통신산업이 활발하게 되어, 이동통신 가입자 수가 1000만 명을 돌파하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이로서 반도체에 이어 통신산업이 전자산업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부품업계에서는 1995년 이래 부상하기 시작한 PC산업의 전개를 계기로 TET-LCD표시부품이 급격한 발전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대형 및 평면형 브라운관의 개발과 더불어 표시(display)부품산업의 발전을 초래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 도입된 전자오락의 주축을 이룬 전자게임은, 1990년대의 PC의 보급과 함께 대화형(對話型)전자오락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소위 게임소프트에 크게 의존하는 전자오락은 PC방이라는 새로운 사업을 유발시키는 등 관련산업을 파생촉진시켰다. 그리고 1998년을 전후하여 저조해진 전자산업을 활성화하는 데 전자오락이 기여하였다.
아게이드·비디오·PC·온라인(on-line) 게임 등으로 분류되는 전자게임 중 선발주자는 아게이드 게임의 경우, 1998년 5%의 시장성장률을 보였고, 2002년에는 28%의 성장률이 예상된다. 1998년에 출발하다시피 한 PC게임은 2002년에는 20%의 성장을, 또 온라인 게임은 9%(1998년)에서 2002년에는 30%의 성장이 예상된다.
비디오게임을 2002년 25%(1998년 9%)의 성장이 예상된다. 1999년 전자게임산업을 위해 게임종합지원센터가 설립되었고, 국제적 전시회로의 출품 등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사업은 인터넷시대에 각광을 받을 것이 짐작되는 멀티미디어 콘텐츠(contents)사업의 핵심이 될 것이며, 소프트웨어와 함께 관련 하드웨어면에서도 전자산업의 중요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1990년 들어 인터넷의 확대는 고도정보화사회로의 천이(遷移)를 상징하는 것으로, 소위 홈페이지(home-page)의 세계적 보급은 그의 일면이다.
이와 같은 인터넷의 확장은 전자상거래(electronic commerce)를 포함한 금융산업으로 퍼져가고 있어 1995년 이래 주목을 끌고 있고, 1999년 전자거래 기본법과 전자서명법이 시행되면서 전자산업에 큰 변혁을 초래할 전망에 있다.
B-to-B(기업간 상거래)형은 1999년에서 2005년간 연평균 110%의 성장률을, B-to-C(기업 대 소비자간 거래)형은 같은 기간 중 66%의 연평균 성장률이 예상된다. 이와 관련된 전자산업도 새로운 면을 보여줄 것이다.
1995년 WTO체제가 출범되고, 1996년 전자선업이 전체 수출의 50% 가까이를 점유하게 되면서, 전자산업의 국제화와 기술개발이 급속히 진행됨에 따라 전자통신기술에 대한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이 인식되게 되었다. 국내에서의 전자전기에 관한 특허 및 실용신안 출원은 1996년도 전체의 43%를 차지하였다.
특허출원은 전년도에 비해 65%의 증가를, LCD·FET 등은 55%나 증가하였다. 특히 컴퓨터소프트웨어·반도체칩·데이터베이스·인공위성·유선방송 등 전자산업에서의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이 급속히 부상되었다. 특히 미국 및 일본과의 사이에서의 문제는 심각해졌다.
실제 1991년 로열티(royalty)로 해외에 지불한 금액은 1981년에 비해 11배로 증가하였고, 침해배상액과 로열티, 그리고 국제적 기술분쟁이 급상승함에 따라 지적재산권에 대한 인식이 부상되었다. 1980년대 중간부터는 지적재산권의 교차승인(cross-license)으로 문제점의 일부를 타개하기도 하였다.
기술의 개발과 토착화를 위하여는 지적재산권에 대한 대책은 긴급한 과제이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환경보호는 국제적 과제로 제기되고 있었고, 공해가 적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전자정보통신 사업이지만, 반도체를 비롯하여 부품이나 기기의 생산과정에서 역시 공해가 유발된다.
전자산업의 국제시장진출을 위하고 또 국내 환경보호를 위하여 환경친화적 생산공정과 소재 개발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되고 있다.